레퀴엠[Requiem], 아름다운 울림

나는 항상 음악을 틀어놓고 잠에 빠진다. 그래서 늘 습관처럼 자기 전에는 CD가 정리되어 있는 조그만 책장에서 어느 음반을 들을지 고르고 CD 플레이어에 걸어 놓은채 1시간~2시간 정도 플레이가 되도록 셋팅한 후에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눈을 감는다. 아무래도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 가족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한 음악들을 틀어놓는 편이다. 최근 자주 듣던 Gustav Mahler의 교향곡 9번 중 4악장이나 다른 교향곡들의 아다지오 악장들, 혹은 Meditation이라는 글자가 크게 써있는  EMI에서 발매된 소품 음반 같은 것들이 지겨워지자 다른 음악을 찾아보고자 인터넷 탐험에 나섰다.

레퀴엠은 그러한 목적에 딱 맞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은자를 위한 미사 음악”이 원래 뜻이지만, 사실 원래 목적으로는 쓰여질 수 없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죽은 사람은 음악을 들을 수가 없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죽은 이를 위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불러주는 아름다운 음악을 못듣는 다는 건 죽은이에게나 살아남은 사람에게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어설픈 대리만족이지만 자기 전에 누워서 들으면 그나마 목적에 50%는 부합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요즘은 열심히 음반을 꺼내어 든다. 내일 아침에 또 부활하긴 하겠지만 어쨋든 잠시나마 죽은 거니까.

서양 고전음악에서 레퀴엠으로 유명한 것은 몇 개를 꼽을 수 있는데 모짜르트(Wolfgang Mozart)의 것이 하나, 그리고 포레(Gabriel Faure)의 것이 또 하나, 브람스(Brahms)의 독일 레퀴엠, 마지막으로 베르디(Giuseppe Verdi)의 것이 하나. 모짜르트는 오스트리아 사람이고 포레는 프랑스 사람, 브람스는 독일 사람, 그리고 베르디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각각의 악곡에 그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브람스와 베르디의 레퀴엠은 거의 듣지 않으니 모짜르트의 것과 포레의 것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자 한다.

모짜르트의 레퀴엠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작업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모짜르트가 완성시키지는 못하고 그의 제자였던 쥐스마이어 Lacrimosa의 후반부 이후를 스승이 남긴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성했다고 하여 사실 진정한 모짜르트의 악곡은 아니지만, 늘 활기차고 밝은 음악으로 기억되는 모짜르트의 다른 곡들과는 달리 경건함과 엄숙함이 잘 녹아 있다. 마치 그의 40번 교향곡 같은 느낌이다. 자신이 작곡한 곡이 자신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던 묘한 곡이기도 하다.

가장 인기가 있는 부분 Lacrimosa(눈물의 날)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의미 심장한 주제 동기로 적절히 사용된 부분. Celibidache가 지휘하는 Muchner Philharmonik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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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신론자도 아니다. 서양 사회의 기반을 흐르는 기독교를 통한 믿음이 이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음악, 또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유럽 여행을 그렇게나 갈구하게 만드는 수많은 문화적인 유산으로 표현되어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쁨을 줄 수 있으니 그 업적 만큼은 칭송 받아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짜르트의 레퀴엠도 꽤 듣는 편이지만, 그 보다는 개인적으로 포레의 레퀴엠을 훨씬 더 선호한다. 심포닉한 화음을 만들어내는데는 모짜르트의 재능이 아주 뛰어난데, 단선율의 어떤 멜로디를 가지고 엮어 내는 기술은 포레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시칠리안느(?) 같은 곡을 들어보면 특히 현악을 잘 사용하는데 이러한 간결하면서도 깔끔한 모습이 레퀴엠에는 아주 잘 어울린다고 본다. 모짜르트 만큼의 경건함은 좀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뭐 듣기에 좋은 음악이 좋은 음악이다. 묵직한 현의 울림이 매력이다.

드디어 나왔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포레의 레퀴엠중 Agnus Dei(하느님의 어린양)다.  역시 비교하기 좋게 역시 Celibidache가 지휘하는 Muchner Philharmonik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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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은 Celibidache의 음반을 즐겨 듣는데 다소 느리게 설정한 템포와 오직 라이브만을 고집스럽게 추구한 결과로 음반에서 나타나는 현장감. 특히 연주가 모두 끝나고 나서 여운을 즐기면서 천천히 여기저기서 조용하게 터져나오는 박수는 매력적인 감상포인트다. 

녹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오케스트라의 실연을 가서 들어보는 것 만은 당연히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악기의 소리보다 음반으로 들었을 때 더 손해를 보는 것은 바로 성악이다. 아무리 녹음 기술이 발달하고 재생 매체가 좋아진다고 해도 실제로 콘서트홀에서 듣는 합창단의 거대한 에너지를 재현해 내기란 불가능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합창을 실제로 들을 기회만 노리고 있지만, 아직 포레의 레퀴엠은 국내에서 연주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오르간이 없어서 그런가.

우리나라도 고전음악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서 조금 마이너한 악곡들도 연주되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지만(사실 포레의 레퀴엠 정도면 마이너 한 것도 아니다)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운전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타면 일부러 모르는 척 요즘 듣는 고전 음악을 틀어놓는데 대부분은 끄고 라디오를 듣거나, 조금 더 신나는 음악이 없냐고 물어보곤 한다. 아마 누군가 “이 음악 좋은데 무슨 곡이에요?” 라고 물어본다면 신나서 설명해주고는 매일 같이 드라이브하자고 졸라댈지도 모르겠다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