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사고

사고(思考)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이분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실, 사고 속에서 뿐 아니라 현실 세계에 구체화 된 것 중에도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양쪽으로 뭉쳐 결국에는 두 개만이 남는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나 미국의 정치에서 고착화된 양당 체제나 혹은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종교 권력과 군주 권력의 갈등이나, 예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추상 및 초현실 주의와 자연주의의 대립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대립의 원천이 사람들의 정신 세계로부터 나온 에너지일 때 이러한 현상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의 의사가 대립되는 정치 세력을 통해 표출되는 경우, 혹은 독실한 신앙의 힘과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반한 군주 권력의 대립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미의 궁극적인 목표를 찾느냐 아니면 더 관념적인 것을 맹신하느냐 하는 예술에서의 대립도 마찬가지 이다.

사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많은 비판을 받는다. 특히 요즘과 같이 다양성과 창의성이 중요한 인재상이 된 이후 부터 이분법적 사고는 차마 입에 올리기 부끄러운 야만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이분법적 사고는 독선과 불통을 불러오고 따라서 민주적 의사 결정을 가로 막으며, 사람을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단계로 나가기도 전에 차단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개체이다. 할 수 있는 이라거나, 하고 싶은 이라거나, 할 수도 있는 이라거나 이런 것이 아닌, 하는 개체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 판단을 하려고 할 때 이를 논리적인 사고의 흐름으로 모델링하고 그 중간 중간 이분화되어 있는 논리적 판단을 삽입한다. 아무리 복잡하게 보이는 상황 판단이라도 결국 쪼개보면 “내가 이럴 경우 이걸 하고 아니면 하지 않는다.” 라는 단순한 조건문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변환 과정을 스스로 해내는 복잡한 문제보다는 두 개 중 하나만 골라야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훨씬 더 선호한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저녁 코스 메뉴를 고를 때 메뉴가 2가지라면 사람들은 가장 처음 비싼 것, 싼 것으로 나누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 비싼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여기서 싼 것을 선택한다. 메뉴가 3가지라면 사람들은 가장 비싼 것 하나와 비싸지 않은 것 두 개로 그룹을 나눈다. 그리고 비싼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비싸지 않은 것 두 개 중에 다른 가치 판단 기준에 의하여 또 다른 판단을 내린다. 일반적으로는 중간 것을 선택하는데 이와 같은 사람들의 행태를 이용하기 위해 보통은 3가지 메뉴를 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사적으로도, 또 복잡한 이성과 논리가 도입되기 전 (근 이백 년 전의 모든 시대가 이러하다) 진화 과정에서도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두 가지로 나눈다. 남자와 여자, 나보다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우리 편과 적, 나보다 빠른 먹이 감이나 느린 먹이 감. 논리가 필요 없으므로 가장 단순하고 정신적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는 판단을 통해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려는 전략이기도 하고, 사색보다는 빠른 판단이 훨씬 더 중요한 상황에서는 무조건 이분법적인 판단이 가장 선호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 현대의 사람들도 따라서 똑같은 습관과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마치 초등학생이 책상 위에 짝꿍과 영역을 나누기 위해 선을 긋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 속에 무수히 많은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정치색에 대한 선을 긋고, 예술관에 의한 선을 긋고, 선호하는 남성과 여성의 타입에 선을 긋는다. 비록 이 공간이 1차원이 아니라, 2차원, 3차원 혹은 그 이상이어서 점을 찍던, 선을 긋건, 면으로 나누던 확실한 것은 세상을 두 가지로 분할 한다는 것이다. “정치”라는 공간 속에 자연 분포(Normal Distribution)되어 있는 대중들이 무수히 많은 선을 그어 나눈 후 그 중 하나를 선택하면, 그 결과는 당연히 두 개로 분할되어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두 개의 정당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분법적인 사고가 나쁘거나, 혹은 권장되어야 할 것이라는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분법적 사고가 모든 인간에게는 아직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본능적인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요구 된다고 하면 그 사실에 대한 증명과 그 방법을 개발하면 좋을 것이다. 나는 단순히 이분법이기 때문에 이분법이 나쁘다라고 하는 판단에 반기를 들고 싶다.

[금융공학] 효율적 시장과 제로섬 게임

지금 배우고 있는 각종 파생 상품은 결국 시장 참여자들 간의 제로섬(Zero-sum) 게임이다. 내가 얻는 이득이 있으면 분명히 누군가는 정확히 같은 양 만큼의 손해를 본다. 주식 시장도 다르지 않은데,  주식 시장은 기업의 활동을 촉진시킨다는 긍정적인 측면의 해석이 그나마 조금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 파생 상품 시장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시장이 완전히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기여하는 것, 그리고 기업 운영에 있어서 다양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측면에서 필요한 것까지는 납득이 간다. 하지만 시장에 참여하는 기업이 회피한 리스크는 소멸하지 않고 누구에게 전가되는 것인가를 잘 살펴보면 이도 역시 기업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해 그 시장의 변동성을 누군가에게 전이 시켜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흔히 자본주의에서 그렇듯 더 이상 사고를 발전 시키지 않고 “기업이 잘 되는 것”이 사회의 일등 가치인 것처럼 여기고 이를 위해 필요한 사회적 희생에 대해서 묵과한다면 결국 리스크의 양극화가 일어나고 너무 많은 리스크를 보유하고 있는 사회 구성을 위해 필요한 보다 중요한 것들이 고통 받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요즘은 아무도 시장의 완전한 효율성과 부의 분배, Invisible Hand를 믿지 않는다.  끊임없는 실험과 검증, 가설과 적용, 평가와 개선이 반복되는 공학의 근면함이 금융의 탐욕성에 제동을 걸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제 양쪽을 다 배운 만큼, 사회적 책임도 생각해 볼 의미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