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와 이퀄리브리엄

부조리하다고 느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해보면, 사실 이것이 아슬아슬한 평형 상태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세상 곳곳의 맞닿아 있는 많은 면들은 나름대로의 소재와 역사로 서로를 밀어내며 안으로는 버티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 형상이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여기에 악(devil)이 잔뜩 숨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왜 이런 형상이 되었는지를 잘 파악해보면, 다수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로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얼마나 노력을 했어도 많은 변화를 불러오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그 합리적 선택의 가치를 더 많이 인정한다면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여기서 부조리를 꽤나 찾아낸다면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미묘한 평형과 긴장 상태를 완전하게 잘못 쌓아올려진 부조리의 덩어리로만 보거나, 혹은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한 이상체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 상태를 그냥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깊이 인식 하기 위한 결정의 층위를 우선 살펴보고, 조금의 에너지가 남는다면 주어진 조건에서 이 상태가 최선인가를 판단하거나, 미래에도 이 것이 만족스러운 결과일 것인가를 예측하는 데 쓰는 것이 시각에 구분없는 보편적으로 건전한 태도가 아닐런지.

등산의 의미

나이를 먹을 수록 등산이 가고 싶다.

내 20대 시절, 토요일 아침부터 부지런히 주말을 시작할 때는 이른 시간부터 사당역을 가득 매운 등산객 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성들은 나의 미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등산에 시간을 낭비하지?” 유투브를 보며 아파트 25층 오르 내리기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 하얀 중년 남성이 만들어낸 사당역의 번잡함에는 물론 합리적인 이유들이 많다.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운동이고, 누구를 불러내도 부담이 없다. 건강에도 물론 도움이 된다. 사계절 변화하는 풍경을 즐기거나,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도 있다. 근교의 산이라면 다른 운동에 비해서 시간이 딱히 많이 들지도 않는다. 두 다리와 등산화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나의 28살 시절에도 이런 이유들을 생각했음에도 여전히 다른 것들이 더 재미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12년이 지나 내가 40대에 접어들 무렵 하나의 이유를 더 찾아냈다. 그 등산객들, 특히 중년의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내가 찾아낸 이유 때문에 부지런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정점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 정점에 서서 더 이상을 올라갈 수 없는 데까지 다다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이미 정점에 도달해서 내리막에 접어들 무렵,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곳까지 두 다리로 걸어올라가 세상을 내려다 보는 희열을 상상하고 경험하고는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누가봐도 정점이 있는 운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