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벗기다

지난 주 지하철의 노약자 석 앞자리에 서 있자니 내 앞에  80줄의 할머니와 여대생이 손잡이를 나란히 잡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젊은이는 오른손으로, 할머니는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있어서 이웃한 손잡이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의 손, 손목, 그리고 팔꿈치까지 나란히 보였다.

비슷한 두께의 팔이었다. 또 한편으로  그 나이에 어울리게 서로 다른 손과 손목, 그리고 팔이었다. 여학생의 손과 팔은 아기의 팔을 확대 해놓은 것 같다. 햇빛은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쐬지 않는 것 같았다. 근육이 동작하기 위한 일체의 단련이 되어 있지 않다. 반면 할머니의 팔은 다크 브라운과 살구색의 그라데이션이 앞 뒤로 이어진다. 얼룩덜룩한 반점과 사방팔방으로 교차하는 잔주름이 새겨져있다.

할머니의 팔 위에는 오육십년의 세월이 있다. 하지만 그 세월은 팔에 침착된 것이 아닌 마치 아침마다 입는 셔츠처럼 입고, 또 벗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6만원짜리 실크 블라우스를 입는 것처럼, 60년짜리 세월을 입으면 한 순간이라도 오른쪽 팔이 왼쪽 팔로 바뀔 수 있는 것처럼. 그러자 할머니의 팔에서 세월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젊음의 표현, 그리고 그 향기는 어떤 사람에게나 매력과 동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누구나 나이가 들면 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생명 에너지를 잃고 만다. 더 이상 아름다워야 할 이유가 없고, 더 중요한 일이 시간과 여유를 빼앗아 간다. 시간, 돈, 그리고 심지어 아름다워야 할 이유가 많다 하더라도 사그라지는 젊음의 표현을 늦출 순 있지만 거스를 수는 없다.

내게 젊음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다른 인격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연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30년이 지나도(물론 살아있거나 국적을 변경하지 않았다면) 같은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가족 관계와 같은 허리디스크를 안고 살고 있을 것이다. 그때 쯤에는 젊음의 이름다움은 사라지고 노(老)라는 이름의 싸구려 구제 망토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내가 견뎌온 세월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시간은 우리에게 세월을 입히지만, 역으로 그 세월을 다시 벗어 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게도 한다. 누군가의 세월을 함께, 같은 입장에서 경험한 사람에게만 가능할 것이다. 누군가의 생채기가 어느 시절에 어떻게 남았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이를 치유할 수 있는 눈이 생긴다.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런 눈을 가진 그 자체가 보석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오래된 모습을 기억하고 세월의 흔적이 아닌 젊은 시절에 가졌던 매력이 아직 내면의 진주처럼 남아 있기에 서로 멀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불 같은 젊은 시절이 시간이 흘러 다 타버렸을 때 그 속에서 진주를 키워낼 수 있는 핵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후 수십 년을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상대방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상대의 젊음이 아름답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상대의 세월을 벗기는 것보다 로맨틱 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순위를 매길 수 있다는 생각

‘전국 5대 빵집’만큼 알면서도 속는 캐치프레이즈는 없는 것 같다.

전국이라는 범위가 비현실적이고, 5대의 선정 기준도 애매모호하다. 3대 쯤 되는 빵집에서 단팥빵을 사먹었는데 평생 돈만 세다가 퇴직한 은행원 아저씨가 제빵학원에서 6개월 수강하고 만든 우리 동네 빵집이랑 차이를 못느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집 간판이나, 블로그 제목이나, TV 프로그램 어디서나 이러한 문구를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에든 순위를 매길 수 있다는 생각과 그렇게 매겨진 순위는 항상 값어치 있는 정보라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다. 이분법과 마찬가지로 꽤나 빨리 난잡한 정보를 정리하는데는 순위를 매기는 것(Sorting) 만큼 효율적인 일도 없다. 그리고 순위를 매겨 놓으면 나중에 이걸 다루는 일을 할때 드는 시간도 짧아진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키 순으로 번호를 매기고, 대학교는 성적 순으로 잘라 입학 시킨다. 결혼 정보회사는 등급제를 운영하고, 잡 코리아에 가면 한국 기업을 연봉 순으로 정렬해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순위 사회에 살다보니 무엇에나 순위를 매기려고 하는 버릇이 생겼다. 버릇 수준이 아니라 과도한 순위병 환자들이다. 그리고 이 병의 가장 큰 부작용은 시간을 들여 오래 보아야 음미할 수 있는 향기를 못맡는다는 것이다.

5대 빵집을 선정해서 빵집에 1, 2, 3, 4, 5를 매기고 나면 빵을 만드는 사람의 노력, 그 빵집 만의 독특한 빵, 빵집의 독특한 향기와 위치, 그 빵집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는 모두 사라지고 어떤 빵집이 다른 빵집보다 낫다라고 부등호 몇 개만 남는다. 그리고 실제 방문해보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식된다. 이것은 빵집 주인 뿐아니라 빵을 좋아하는 빵돌이들에게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나는 빵돌이가 아니라 상관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이러한 문화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이다. 나의 노력은 무시되고 결과, 점수, 순위만 남는 세상에서 사람의 매력과 스토리, 애정 그리고 향기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우리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으로서 사람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만큼 사람의 가장 큰 불행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것을 순위로 처리하도록 강요받는 현대 사회에서 이것과 역행하는 삶을 살기란 정말,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무엇을 순위대로 보지 않으면 나의 순위가 내려가는 세상의 규칙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 규칙대로 참여하거나, 떠나거나 하는 두 가지 선택만을 강요 받는다.

하지만 이것을 바꾸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내가 무엇인가 시작해야 한다면 1과 2 사이에 위치한 2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의 아름다움이 1과 2사이의 벽을 허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아름답고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준다면 순위가 의미 있는 세상이 아니라 그 존재가 의미 있는 세상으로 조금 씩 옮겨 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