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다, 선택할 수 있다

사무실에서는 종이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자리는 파일이 대신한다. 사직서 혹은 사표는 옛날 드라마나 사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사표를 품에 넣고 회사를 다닌다. 언제라도 상사한테 던지고 싶지만 사슴 같은 와이프와 토끼같은 자식들 때문에 참는다…’ 는 류의 어릴때 읽고 들었던 말들 말이다. 그 때마다 직장인의 고생, 책임감 같은 것을 떠올리며 ‘우리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고생하며 키웠구나’ 라는 이 뻔한 표현만큼 뻔한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내가 그 나이가 되고보니 직장인의 사직서 라는 것을 꼭 품고 다니는 이유가 조금 다르게 이해된다. 위에서의 압박에 대해 대항하는 상사에게 던져버리고 싶은 무기가 아니라, 막다른 길에서 모든 고생을 끝내고 해방할 수 있는 문 하나를 가슴속에 품고 다니는 것이다.

더 이상 희망도 없고, 에너지도 없을 때 하나의 위로. 그렇다고 그 문을 열고 쉽사리 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택하는 것이 아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이루어 온 것과 나

오십살, 육십살을 넘게 살아 이제 새로운 도전과 성취보다 하나씩 넘겨주고 잃어버릴 때가 되면 내가 그동안 이루어 온 것이 결국 ‘나’라는 인격, 자아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지켜 왔던 가치, 쌓아 올린 사회적 지위와 명성, 부, 자식의 삶 같은 것들이 결국 나라는 사람의 삶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때 예상치 못하게 이런 것들을 잃게 되면 그 상실감과 허망함이 얼마나 클까? 나는 반드시 잃게 될 두려움에 무엇을 쌓아 올리기 겁이 날 정도이다. 그 두려움에 몇 달 전의 글에서는 죽기까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감히 생각하기도 하였다.

오늘 가치를 위해서 살다가 이를 잃게 된 한 정치인의 비보를 들으면서 가치, 신념, 이상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는 평범한 사람은 가지기 어려운 용기가 필요한 것임을 새삼스럽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