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만 영원하다

진리는 있는가? 도덕은 진리와 같은가? 그것은 영원한가? 진리는 모두에게 보편적인가? 진리는 가치 있는가? 진리가 없다면 절대적인것은 있는가?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일까? 상대성을 모두 빼고나면 무엇이 남는 것일까?

삶이 혼란스럽다보니 내가 의지하고 바라보며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을 찾게 된다. 북극성이 없었다면 희망봉을 돌았을까? 그리고 과연 그것이 어디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잠시나마 답을 찾았다고 착각했다가 또 달리 순식간에 답이 의문이 되고 또 다른 답을 고민하게 된다.

그러면 결국 나, 그리고 내 삶에 대해서 절대적인 것, 진리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바른 것,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옳은 것, 그리고 내 능력이 닿는 한 내 가족에게는 가치 있는 것만 생각하기로 한다. 그 외의 것은 나의 고민이 닿지 않는 범위로 내버려두기로 한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위에서 고민한 많은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모두 ‘아니다’ 로 단순해졌다. 단순한 것이 행복하고 아름답다. 그래, 어쩌면 이것도 나에게는 옳은 것 한가지 일 수 있겠다.

공부를 하는 이유

내가 하는 순간 순간의 선택,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이 선택이 현실 사회를 내가 바라는 세상 쪽으로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란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내가 하는 사회적인 고민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물론 어떤 선택에서는 사회적인 고민 없이 지극히 현실과 타협하는 개인적인 고민만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의 행위와 나의 이상이 서로 정렬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식자(識者)로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사회는 너무 복잡한 인과 관계로 얽혀 있어 그 선택의 이면에 존재한 다이나믹을 알기 어렵다. 나의 행위는 어떤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타인의 어떤 행위를 낳고, 그 사람은 다시 어떤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연결 속의 영향력은 점차 증폭되거나 점차 감쇄되어 내가 작은 행동을 할 때 미쳐 의식하지 못했던 나비 효과를 가져온다.

내가 지불한 돈이 누구에게 어떻게 흘러들어가서 이용되는지 알아야 하고, 내가 지킨 법규나 도덕룰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영향을 행사 하는지 알아야 하고, 나에게 작은 권력이라도 있다면 이를 이용하는 것이 그 영향력 하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 시킬지 알아야 한다. 사회는 무수히 많은 행동과 반응, 증폭과 감쇄, 전파와 소멸을 한꺼번에 넣고 뒤섞은 창고와 같다.

가끔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나의 행위와 이상이 정렬 하는지 확인하려면 내 선택의 이면을 하나 하나 올바른 방향으로 따라가야 한다. 이게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이다. “내 선택이 세상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부끄러운 일을 할때, 혹은 부당한 일을 할 때 이러한 인과 관계를 가능하면 감추려하고 약하게 만든다. 또는 정반대의 인과 관계라는 인식을 부당하게 심으려 한다. 알지 않으면, 깨어있지 않으면 혼란 속에서 나의 행위가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의 세상을 오게 만든다.

진리는 나의 빛. 거창하게 진리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감춰진, 은폐된 다이나믹을 아는 것이 현실에서의 소소한 선택에 빛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