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행위

주방에 설치된 식탁 등 위치를 조금 옮겨 달았다. 우리 가족은 내 나이 만큼의 아파트 내부를 고쳐 살고 있다. 아주 오래된 아파트라는 뜻이다. 처음 입주할 때 부터 식탁등 위치가 애매했다. 원래는 식탁 자리였을 것이다. 주방을 고치면서 아일랜드를 짜고 식탁을 거실쪽으로 1.5미터 정도 옮겨 놓은지라 조명이 아일랜드 위에 달리게 되었다. 요리를 자주 하지 않는 우리에게는 쓰일 일이 없는 조명이었다. 다만 거실 등을 끄고 켜놓으면 노란 백열 전구라 집안 전체에 따뜻한 느낌을 준다.

우리집 인테리어를 해주셨던 아저씨를 불러 몇 만원 주고 이 조명을 식탁위로 옮겨 달았다. 요즘 아파트와 다르게 천정이 벽지바른 콘크리트 인지라 맵시있게 전선을 숨길 수 없었다. 쫄대를 1.5미터 정도 이어 천정에 붙이고 안쪽으로 전선을 연장하여 넣었다. 쫄대를 하얀색으로 선택해 그나마 티가 덜 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뜯어진 벽지도 적당히 마감했다. 천장을 올려다볼 일은 드무니까 괜찮아 보였다.

원래는 밥을 밝게 먹자는 의도였다. 조명이 있으면 반찬도 한층 더 맛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뿐이 아니었다. 몇 만원이 주는 변화는 놀라웠다. 예전에는 소파와 방, 침대 위에서 책을 보거나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던 가족이 식탁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늘었고, 식탁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간 둘러 앉을 만한 공간이 없었는데, 밝은 공간 속에서 집중할 수 있게 되므로 생긴 변화다.

우리는 의지로 행동을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이는 쉽지 않다. 하나의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 품고 있어야 하는 의지의 크기는 크고 기간은 상당히 길다. 이번 일을 계기로 새삼 깨닿는다. 그래, 훨씬 쉬운 방법이 있다. 우리가 가진 물리적 공간을 바꾸는 것이다. 조명을 옮겨 달거나, 가구의 위치를 바꾼다. 또는 에어팟을 처분하거나, 벽에 그림을 걸거나 핸드폰 충전기의 위치를 고정해 놓는다.

공간과 사물은 당연하게도 나의 행동과 연관된다. 내 행동을 유도할 수 있게 ‘섬세한 공간 설계’를 해보면 꽤 많은 좋은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명 위치를 바꾸어 달았던 경험처럼 의도치 않은 긍정적인 방향도 좋지만 이를 영리하게 적극적으로 활용해보고 싶다. 외적인 것으로부터의 변화이다. 형이상학을 낮추고, 형이하학을 높인다. 관념의 세계에만 머무는 어떤 것도 내 삶에 큰 의미가 없지 않은지 알량한 유희에 불과하지 않은지 의심이 든다.

영어의 force someone to ~ 표현이 생각난다. 동사로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억지로 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명사로는 물리력, 물리적인 힘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의지, 설득, 교육으로 바꿀 수 있는 변화도 있지만, 반드시 Force 가 필요한 혹은 효과가 매우 좋은 변화도 많아 보인다. 다른 이에게도 또 나에게도.

자연

‘자연’이라는 말을 한자로 풀이해보면 스스로 자自에 그럴 연然을 쓴다. 스스로 그러한 것이 자연이다. 나는 ‘자연’을 대할 때 만족감이나 감동을 인식하고, 이 것이 머리 속의 ‘자연’이라는 글자의 불을 밝히고, 연상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해석까지 다다를때면 과장해서 벅찬 감동까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말 자체의 아름다움과 그런 이름을 붙인 옛 선인의 지혜로움에 감탄한다.

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스스로 그러한 것’을 좋아한다. 이 표현의 안에는 ‘꾸밈이 없다.’, ‘가식이 없다.’, ‘순리대로 거스르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온전하다.’, ‘완전하다.’까지 모든 표현이 꾹꾹 눌러담긴 것 같다. 세상 만물이 모두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지향점이 있다면 바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봄이 되면 하얀 솜털을 달고 피는 녹색 잎에서, 가을이 되면 꼭 필요한 영양소를 줄기에게 포기하고 떨어져버리는 낙엽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와 내 주위, 그리고 지금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 아닌 것이 너무 많다. 그리고 이 것이 위장된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현혹하는 경우도 있다. 본질 보다는 허상을, 완전함 보다는 위태로운 불완전함을 좇는 경우를 보게된다. 많은 이들이 사물의 불완전함과 나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드러내지 못하면 결국 세상 속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은 점점 사라지게 마련이다.

자연스러운 ‘나’, 자연스러운 ‘음식’, 자연스러운 ‘욕구’, 자연스러운 ‘소비’,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자연스러운 ‘죽음’. 나와 사물, 나와 사람, 나와 나의 본질 사이에 아무것도 두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타인이라는 비판적 거울, 재료 본연의 맛을 감추는 조미료, 강요된 타인의 욕구, 필요치 않은 소비, 목적에 의한 만남, 무의미한 연명 치료 들은 내 삶에 허상이라는 불투명한 층위를 쌓는다. 자연스러운 ‘삶’을 방해한다.

절실하게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럴 수 있다면 내가 곧 자연이고 자연 속에서 아무것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