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세이지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예술은 인간 정신 속의 단단한 알맹이 같은 것이 빛이 어떻게 산란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이 그림, 음악, 소설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을 빗어내는 탁월한 솜씨를 가진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그 단단한 알맹이,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묘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보스턴 심포니가 내는 소리의 미려함(현악이 부각되어서)과 무라카미 하루키 글의 매끈함(아마 글의 리듬감 때문일 것이다)은 묘하게 닮아있다. 이는 두 거장의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다라던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표현된 결과라는 것이 나타난 것이고 결국 예술혼을 가진 두 사람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둘을 좋은 친구로 만들어준 것이 바로 이러한 공통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대부분 읽어서 더 읽을 것이 없지만, 오자와 세이지와 보스턴 심포니의 말러는 들어봐야겠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히 프롬

에리히 프롬의 책을 하나 더 읽었다.

자유와 평등은 현대인에게는 너무나 숭고한 가치여서 자유에 해악이 있거나 평등이 실현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바꿔말하면 자유와 평등은 절대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달아 읽은 에리히 프롬의 책 때문에 이런 생각에 의문이 생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추구하는가? 행동과 판단이 스스로에 맡겨지는 상황을 선호하는가? 기회의 평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는가?

내 생각에 위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데카르트의 말이 생각난다. 위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기 위해 수많은 조건문을 붙이는 것보다 결국 ‘아니오’라고 답하는 것이 더 옳다.

독재를 원하는 사람이 있고, 부의 불평등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보다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다는 사실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