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에필로그

삿뽀로를 떠나는 날이다. 오후 5시 45분의 에어부산 비행기로 동해를 건너 세시간을 날아 8시 45분에 인천에 떨어진다. 에어부산이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삿뽀로 노선에 다시 취항하는 날이고 첫 날이라고 한다. 열흘간 잘 쓰던 만능 JR패스는 어제로 끝났다. 다시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 아케이드를 걸어갈 자신은 없어 공항까지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한다. 스스키노는 번화가로 공항까지 가는 버스가 자주 온다. 오후 3시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면 공항에서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질 것 같다. (사실 공항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았다)

마지막 날은 긴 이동도 없고, 정해놓은 할 일도 없는지라 삿뽀로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구글 맵을 켜고 반경 1~2km 내 있는 관광지를 찾아본다. 그 중에 정부청사, 삿뽀로 시계탑 건물, 삿뽀로 TV타워 그리고 나카지마 공원을 보기로 한다. 2km 반경 밖에 있는 삿뽀로 맥주 박물관도 가고 싶었지만 모처럼 늦게까지 아침잠을 즐긴터라 다녀올 시간이 되지 않았다. 숙소 앞 메가동키에서 여러가지 둘러보며 살 것도 있었다.

아침 산책 겸 숙소를 나서 북쪽으로 올라간다. 어제의 그 불야성은 온대간데 없고 조용하게 유치원생들이 등하교 하는 길처럼 보인다. 부산스러운 출퇴근 길은 이미 시간이 지났다. 걸어서 십오분 쯤 가면 빨간색의 고풍스러운 정부 청사가 보여야 하나, 전면 리모델링 공사 중이라 가림막을 친 터라 건물 자체는 볼 수가 없었다. 가림막에 건물 모습을 대강이나마 인쇄해놔서 형태는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럴 바에야 구글 맵에 수 많은 사람들이 올려놓은 실제 사진을 참조하는 편이 나으리라.

조금 더 올라가면 삿뽀로 역이지만 이제 더 그 쪽으로 갈일은 없다. 내가 걸어온 길 아래로 어제의 거대한 지하 아케이드가 위치해있다. 청사에서 시작해 이번에는 시계탑 건물, 오도리 공원, TV 타워를 쭉 훑으며 내려 온다. 오도리 공원은 좌우가 긴 형태로 여의도 공원처럼 옛날 비행기 활주로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TV 타워는 에펠탑과 비슷하게 생겼다. 다분히 참고해서 지었을 것이다. 한바퀴 돌았더니 배가 슬슬고파 오늘길에 나카우에 들러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이번 여행 식사의 절반은 마츠야, 요시노야, 나카우에서 때웠다. 숙소 쪽으로 오는 길에 공항버스 정류장과 시간표를 확인했다.

공항 버스를 탈 때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았기에 나카지마 공원에 다녀오기로 한다. 스스키노에서 쭉 남쪽으로 15분~20분 정도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커다란 공원이다. 가운데 호수가 있는 산책길을 쭉 둘러 걸을 수 있는데 평일 오전인지라 주로 놀러나온 유치원 어린이들을 볼 수 있었다. 유명한 클래식 음악 콘서트 홀도 있고, 홀 앞에는 뜬금 없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동상도 있다. 동상의 키가 작은 것은 나름대로 현실고증인가 싶었다.

호헤이칸이라는 140년 된 옛날 호텔도 있다.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도색된 건물 외벽이 겨울에는 눈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헤이칸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빵을 뜯어 먹으며 여행을 복기해봤다. 방문했던 곳, 먹었던 음식, 탔던 기차와 지나친 역, 도시와 자연의 풍경,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 짧은 시간이지만 한반도보다 훨씬 큰 크기의 공간 속을 누비고 다니며 좌충우돌했던 것이다.

다시 숙소 근처의 메가 동키, 돈키호테 매장 중에 건물 하나를 통으로 쓸 정도로 큰 매장, 으로 와서 남은 현금을 이용해 몇 가지 기념품을 샀다. 이치란 인스턴트 라멘, 이토엔 녹차, 아들을 위한 초코 과자 류. 파스모에 충전한 것 중 남은 현금은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는데 쓴다. 마치 유산을 정리하는 노인 같다. 메가 동키 지하 일층 코인록커에서 아침부터 맡겨놓은 배낭을 찾아 둘러매고 공항 버스를 타러 갔다. 5분 정도 기다려서 정시에 도착한 친절한 버스를 타고 간다. 세계 여러나라 버스들을 타봤지만 우리나라 공항버스만큼 편하게 탈 수 있는 것이 없다. 친절과는 별개로 등받이가 너무 서있어 마치 이코노미석에 타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 다음 일정은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공항에서 맥주를 좀 사고 한참의 기다림, 수 많은 커플과 함께하는 귀국길, 일본과 대비되는 편리한 공항버스, 현관문의 열림과 이미 잠든 아들의 얼굴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풍경이다. 오랜만에 내가 자랑하는 포근한 내 침대에서 온기를 느끼면서 잠이 들었다. 새벽에 잠깐 깼을 때는 마치 엄청나게 긴 꿈을 꾸다가 잠깐 눈을 뜬 느낌이 들었다.

여행의 시작에서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출발했다. 충분히 혼자하는 여행을 즐긴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같이 하는 여행에 비해 즐거움과 추억은 덜하다. 이 글도 나를 위해 쓰는 것이고 공감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같이 하는 여행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을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현실의 나는 점점 내가 원해서 쓸 수 있는 나의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여행 속의 나는 내가 원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전부가 된다는 것, 그런 경험과 여행이라는 것이 참 좋았다. 이번 여행은 마무리 하였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다시 혼자하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아, 그리고 정산해보니 항공권 20만원, JR패스와 교통비 50만원, 숙박 40만원, 기타 잡다한 비용 60만원 정도로 170만원의 여행이었다. 혼자 고생하는 여행이란 참 좋다.

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오타루, 삿뽀로

러브레터를 처음 봤던 것이 22살 때 였다. 그 이후로도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를 몇 편 보았는데 러브레터 만큼 완성도와 대중성을 가진 영화는 없었다. 많은 러브레터의 팬들이 영화 배경지 오타루를 찾아 소위 ‘성지 순례’를 한다고 한다. 여름의 방문을 앞둔 지금은 완연히 다른 거리의 풍경에 영화 속 장면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늘은 긴 기차를 길게 타고, 영화의 배경지 오타루로 간다. 그리고 다시 삿뽀로로 돌아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낼 것이다. 사실상 온전한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고풍스러운 은행 건물 안의 도미토리 룸에서 깬다. 조그만 플라스틱 부스에서 샤워를 하고 곤히 잠든 월드 시티즌들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조심 나왔다. 빨간색 나선 계단을 내려와 키를 반납하고 들어올때와 반대인 부두 쪽 문으로 나선다. 부둣가와 개조된 붉은색 창고 들이 보인다. 요코하마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봤는데, 이쪽이 훨씬 작고 귀엽다. 역 까지는 걸어간다. 걸어가는 길이 편하지 않다. 대부분 트램을 타고 올 수 있는 안쪽 길로 오가는 것 같다. 비교적 넓은 차로 변으로 정비되지 않은 인도가 이어진다. 오른쪽으로는 꽤 큰 규모의 호텔이 줄줄이 서있다. 이른 체크아웃 손님들이 고급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온다. 아마 바다와 어제 올랐던 남쪽 전망대를 조망할 수 있는데다 기차역에 가까운 부지여서 호텔로 개발 되었을 것이다.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고가도로로 올라갈 수 있는 차로를 왼쪽에 두고 좁은 인도를 한참 걸어간다. 정비가 잘 안되어 있다. 10여 분 남짓 걸으니 조금은 보행자 친화적인 인도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예상했던 대로 아침 시장이 나타났다. 시장 입구에는 러시아산 킹크랩이 수족관에서 가만히 밖을 보고 있다. 수염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다. 다리 하나가 어마어마한 길이다. 노량진에서는 이런 크기를 본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여기도 킹크랩이 비싸다. 킹크랩을 싸게 먹을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 없는 것 일까.

아침 시장을 한바퀴 휙 둘러봤다. 해산물을 고르면 계속 쉭쉭 소리를 내는 커다란 찜통에 넣어준다. 가게 옆의 좁은 탁자에서 잠시 후 꺼내어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안쪽에 붙어있다. 주로 해산물 판매점이 많았는데 내가 혼자 먹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참치를 부위별로 조금씩 파는 상점이 있다. 아침으로 생참치를 먹기는 싫다. 역으로 오는 길, 세븐 일레븐에서 빵 두개와 커피를 하나 산다. 빵 하나와 커피 두개 였던가? 아니다 빵 두개와 커피 하나일 것이다. 평생 커피 두 잔을 한번에 사본 적은 단연코 없다. 이것은 기차에서 먹을 아침 식사이다. 출발 시간에 얼추 맞추어 어제 내렸던 하코다테역으로 향한다.

삿뽀로로 향하는 오늘의 두 번째 발차 ‘특급 호쿠토’ 열차를 탄다. 신칸센 같은 고속 열차는 아니다. 특급으로 달려도 삿뽀로 까지는 무려 세 시간 반, 길이로는 300km를 넘게 달린다. 선로는 대문자 S를 그리며 한번은 바다를 끼고 오른쪽으로, 또 한번은 산을 끼고 왼쪽으로 크게 돌아간다. 아마 직선으로 철로를 놓을 수 있다면 시간이 반은 줄 것이다. 편도 요금이 9000엔이 넘는다고 한다. 하코다테가 왜 여행하기 어려운 도시 인지 이해가 간다. 한국사람들은 주로 비행기를 이용해 삿뽀로로 들어가고 나올텐데, 볼거리가 많지 않은 하코다테 방문에 교통비만 16만원, 둘이오면 32만원, 가족이 오면 48만원을 써야 한다. 나는 다행스럽게 JR패스로 무료 이용.

1등석 칸은 사람도 많지 않고 쾌적하다. 부부로 보이는 노인 분만 몇 타 계셨는데 대부분 삿뽀로에 도착해서 같이 내렸다. 신칸센에도 1등석에는 대부분 나이든 노인만 보인다. 바다와 산을 끼고 달리는 기차는 쾌적하고 멋진 풍경을 자랑했지만, 이것도 한시간 후에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여행 중에는 가급적 ‘디지털 디톡스’ 삶을 추구했다. 필요 없는 웹 서핑을 하지 않고, 유투브 동영상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지 않는 것이 디톡스 법이다. 하지만 추구한바와 달리 내 왼손에서 스마트폰이 떨어지는 일이 많지 않았는데, 지도를 보거나 맛집을 찾거나 사진을 찍는 것은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디지털이 톡식할지 헬프풀할 지는 어떻게 쓰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노트패드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노트패드는 디지털 노트패드 앱이 아니라 거친 촉감의 종이로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이 노트패드를 배낭에 챙기면서 여유가 있을 때 여행의 감상을 적어보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이때가 여행 중 유일하게 노트패드를 꺼내어 뭔가를 끄적인 순간이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는 핑계가 떳떳하다. 따라서 지금처럼 귀국 후 일년이 넘은 시점에 그 때 느낀 감상을 적고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솔직한 그날 노트패드의 감상을 이 블로그에 적을 수는 없다. 다분히 혼자 이국에서 적는 글이란 희망에 차거나 행복에 겨울 수는 없는 것이다.

커피, 빵, 노트, 풍경 그리고 두 번의 화장실이 지나고 나서 창밖으로 나지막한 네모 반듯한 건물이 빼곡히 지나간다. 기차는 치토세 공항을 지나간다. 내일 다시 올 곳이다. 공항을 지나 점차 높은 건물이 나타나고 생각보다 한참을 달려서야 다시 거대한 도심 한가운데, 삿뽀로 역에 기차가 멈췄다. 갑자기 후쿠오카, 나고야, 도쿄에서 봤던 대도시의 풍경이다. 이 사람들은 어디서 나타난건지 어리둥절하다. 내일 오타루를 보고 올 시간은 없다. 내친김에 오늘 오타루까지 달려간다. 잠시 역 밖으로 나가 코인로커에 배낭을 넣고 다시 오타루로 향하는 JR 열차를 탄다. 생각보다 오타루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학생들이 많이 보였는데, 오타루에서 삿뽀로로 통학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열차 승객 대부분은 일본인이지만, 드문드문 한국인 젊은 커플이 보인다. 오타루는 커플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눈과 러브레터가 주는 로멘틱이 있다. 오타루까지는 삼십분 이상을 다시 기차를 타고 가야한다. 앉을 자리가 없어, 문가 편한 곳에 서 있었다. 여행 중 현금을 조금 씩 인출해가며 썼다. 일본은 현금만 받는 매장들이 꽤 있고, 오늘 점심으로 염두에 두었던 오타루의 카이센동 집이 그렇다고 한다. 트래블월렛 카드는 일본 AEON ATM에서만 인출이 가능한데 오타루역 한 정거장 전 쇼핑몰에 이 ATM이 있다고 하니미리 내려서 돈을 찾고 걸어가기로 한다. 보통 역에서 내려 운하를 거쳐, 오르골당까지 간 후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데, 나는 전 정거장에서 쇼핑몰을 뚫고 걸어가 오르골당에서 시작해서 오타루역까지 왕복 없이 편도로 걸어간다. 좋은 루트다.

오타루의 관광지는 뻔하다. 역에서 출발한다면, 일단 정면으로 보이는 큰 길을 따라 내려와 바다와 운하가 만나는 곳까지 간 후, 내륙으로 향하는 운하를 따라 간다. 운하가 지겨워지면 다시 도심쪽으로 방향을 틀어 양쪽으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상점이 있는 관광 거리까지 들어온다. 여기는 카이센동이나 초콜렛, 유리 공예품을 파는 상점들이 가득하다. 이 거리를 따라 다시 조금 걸으면 길가에 서 있는 시계탑과 오르골당이 나온다. 관광은 여기까지로 아쉬우면 다시 온길을 따라 돌아가거나, 아니면 지름길로 딱히 볼 것 없는 거리를 뚫고가거나 할 수 있다. 삿뽀로 역 옆에는 해산물 시장이 있어 내가 먹고자 한 카이센동을 먹을 수도 있다.

시계탑 앞에는 사람들이 서있고, 다들 15분마다 내뿜는 증기를 기다리며 서있다. 캐나다에서 들여 왔다는데 벤쿠버의 유명한 시계탑과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 미국, 캐나다와 우호의 상징으로 주고 받는 물건들이 있는데, 요코하마와 샌디에고의 조각상 등 다른 관광객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스토리를 알게 되는 재미가 있다. 언젠가 벤쿠버에 가서 시계탑을 보겠다고 다짐했다.

오르골당을 둘러보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위에서 설명한 상점 거리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운하까지 살펴본다. 점점 사람이 많아지고 운하 근처에 가자 근처의 대형 버스에서 몰려든 단체 관광객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어제 하코다테에서 봤던 단체 관광객들이 다시 이 곳으로 온 것이다! 여기는 역시 겨울에 오면 좋겠다. 하얀 창고, 하얀 바닥, 하얀 다리와 난간에 쌓인 눈, 그리고 주황색 가로등이 함께 해야 좋은 셋팅이다.

역까지 올라가 카이센동을 먹으러 간다. 시장 골목에는 카이센동 가게가 여럿인데, 그 중 한 곳만 사람이 많고 나머지 가게 들은 그 정도는 아니다. 대기 목록에 이름과 몇 명인지를 적게 되어 있는데,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된다고 한다. 카이센동이 특별한 것은 없을 것이라 바로 그 옆자리로 간다. 앞 가게보다는 한가하지만 여기도 대기가 있어, “RYU”라고 이름을 적고 ‘1’ 이라고 숫자를 썼다. 여기서 “” 라고 적으면 뭐라고 불러줄지 궁금하다. 음독은 그대로 “류”고 훈독은 “야나기”라고 읽는다.

다른 재료보다 성게알(우니)와 랍스터를 넣느냐 넣지 않느냐에 따라 가격 차이가 많이 난다. 나는 여기까지 왔으니 우니를 넣은 4000엔 카이센동을 주문했다. 결과적으로는 실망했다. 제대로된 우니인가 싶었다. 옆 자리에 어린 한국인 커플이 앉아있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계산하려고 카드를 내밀었다. 직원이 여기는 카드 결제가 안된다고 했는데, 잘 이해를 못했는지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결국 현금만 받는다는 것을 알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점원이 ‘라인페이’도 된다고 이야기 하니까 ‘네이버페이’ 바코드를 내밀었다. 역시 안되자 결국 남자친구가 ATM을 찾아 편의점으로 먼 여행을 떠났다. 어린 친구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었다. 내가 계좌 이체를 받고 현금을 주고 싶었는데 괜한 오지랖인가 그만두었다.

나도 비행기를 23살쯤 처음 타보았다. 해외는 25살에 처음 나가보았다. 온전히 여행으로 해외는 28살로 기억한다. 요즘 세대에 비하면 많이 늦었다. 25살, 28살의 해외여행은 지금 생각해보면 미숙함, 아쉬움으로 절반은 채워져있다. 나한테 적당한 호텔을 찾는 법,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법, 리조트에서 이용 가능한 것과 불가능 한 것을 모두 알지 못했다. 그 시절의 화끈거림이 생각나면서 그립기도하다.

다시 삿뽀로로 돌아간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니 사람이 더 늘어나 있다. JR패스의 마지막 매표를 삿뽀로 역에서 한다. 규슈 패스 3일, 전국 패스 7일간 구마모토에서 삿뽀로까지 굽이굽이 달려왔다. 시간만 있다면 철도 최북단 왓카나이까지 무료로 갈 수 있는 통행권인데 아쉽다. 내 체력과 시간은 여기까지구나. 역사를 나선다.

삿뽀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 아케이드가 인상 깊다. 눈이 많이 오면 지상 통행이 마비되는 것에 대비하여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코인록커에서 꺼낸 배낭을 매고 끝없이 이어지는 아케이드를 걸어간다. 쭉 뻗어있는 대로 양 옆으로 수 많은 가지들이 나와있다. 대부분 고층 건물들의 지하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마치 개미굴 같다. 지하라 GPS 위치가 정확히 잡히지 않는다. 한참을 가도 목적지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1박에 3000엔 이하 정도로 필터를 걸어 숙소를 검색하니 나오는 숙소들은 다 이 모양이다.

한참을 걷다 오른쪽 지하 통로로 빠지니 메가 다이소가 나온다. 메가 다이소에 붙어있는 출구로 나가 다시 100미터 정도를 가서 마치 우리나라 재래시장에 지붕을 씌워 놓은 상점가가 나오고 그 상점가 한 가운데 대로에서 한 블럭 뒤쪽에 위치한 건물에 호스텔이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려면 술집과 꼬치구이집을 양쪽에 끼고 골목을 걸어들어가야 한다.

시장 한가운데 있는 호스텔이지만 깔끔하고, 생각보다 시끄럽지 않았다. 아마 창문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이미 하루 종일 기차를 타고, 오타루를 보고 온 덕분에 시간도 늦었고 지쳤다. 주위에서 식사를 때워보려고 한다. 씻고 침대에 누워 주위를 둘러보니 스스키노라는 유흥가가 남쪽으로 있고, 거기에 라멘 골목이 있다고 해서 가보기로 했다.

해질녘 호스텔로 들어왔는데, 씻고 쉬다보니 어느 사이에 밖은 깜깜해져 있었고 어둠과 함께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되어 있었다. 빌딩 전면을 뒤덮은 네온사인과 수 많은 곳에서 들려오는 40대 이상을 타겟으로 한 노래소리, 접객원들 광고하는 버스들이 지나다닌다. 라멘 골목 근처에 가니 골목 입구에 ‘원조 라멘 골목’이라고 써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빌딩과 빌딩 사이의 조그만 통로 골목에 라멘집이 줄지어 있었는데, 대부분 7~8자리만 놓고 장사하는 작은 가게였다. 각자 특기로하는 라멘이 다른지 각양각색의 메뉴와 사진이 붙어 있었다.

다른 곳은 손님이 몇 없어 바로 들어가서 먹을 수 있었는데, 입구의 라멘 하루카라는 곳은 대충 세어봐도 15명은 줄지어 서 있었다. 얼마나 맛집 이길래 다른 곳은 텅텅비고 여기는 이리 사람이 많을까? 나는 줄서서 먹는 것은 거의 하지 않지만, 마지막 밤이라 맛있는 것을 먹고 싶기도 하고, 낮에 카이센동 집에서 줄 서서 먹지 않기 위해 들어간 집에서 실망하기도 했다. 또 검색해보니 구글 평점이 4.8인 가게다. 어짜피 딱히 돌아다닐 곳도 없어서 여기서 한번 먹어보기로 한다.

전례없는 구글 평점 점수에 두근거리며 줄 서 있는 동안 주문을 하고 무려 한시간을 기다렸다. 다찌 옆에 앉은 분도 혼자 오신 한국 관광객이다. 마지막 밤이라 삿뽀로 맥주도 한병 시켰다. 늘 숙소에서 조심스래 작은 한캔을 마셨는데 이제 마음을 약간 놓아도 된다. 줄 서 있느라 아픈 다리에 돈코츠 국물을 꾹꾹 채워 넣어, 남김없이 다 먹었다. 아 맛있다. 12일간 먹은 라멘이 5~6 곳은 될 텐데 그 중에는 입맛에 가장 맞는다. 한국인이 좋아할만한 매콤한 맛을 낸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터벅터벅 숙소로 돌아온다. 마지막 밤이고 잠자리에 들기에는 약간 이르지만, 푹 자고 내일 일찍 시내를 조금 더 돌아다녀 보기로 한다. 별 건 없지만 약간의 쇼핑 계획도 있다. 내일이면 집에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집이 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