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도중에 다음 장의 내용이 바뀌었다!

“책을 읽는 도중에 다음 장의 내용이 바뀌었다.”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 장 내용은 종이에 검은색 잉크로 인쇄되어 단단하게 붙어 있다. 아직 펼쳐보지 않은 탓에 내용은 모른다. 하지만 남겨진 책장은 책을 읽는 내 오른손에 잘 끼워져 있다. 누군가 우리집에 침입해 책의 뒷부분을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자르고 다시 제본하는 것을 상상한다. 마치 애드가 앨런 포의 소설에 나올법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와 내가 읽는 책이라는 것이 세상을 뒤바꿀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와 다르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실존적 불안은 여기서 출발한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눅눅한 다음 페이지, 그 페이지에 인쇄된 선명한 검은색 따분한 문자는 그대로다. 그래, 그건 변할 리 없다. 하지만 그 고정된 문자 나열이 가지는 의미는 변화한다. 그 시퀀스의 사실성, 최신성, 그리고 근거로서의 가치는 읽어나가는 그 순간에도 계속 변화한다. 책은 끝까지 읽기도 전에 진부해지고, 새로운 발견은 더 새로운 발견으로 대체된다. 심지어 한 페이지를 읽는 동안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고 했다. 독서는 제로콜라를 따서 마시는 포만감과는 다르다. 이건 나와 책과의 상호작용이다. 내가 달라지면 맛이 달라지고 의미가 달라진다.

나는 무엇을 근거로 사유해야 하는가. 나의 형이상학적 전개의 기반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내가 읽는 모든 텍스트가 고정 불변이 아니라 의심받는다면 그 위에서 뻗어나간 나의 생각도 그럴 것이다. 나는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이 시간에 잠을 자고 저녁에 더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게 체력을 남겨두는 것이 좋은 생각인듯 하다. 그 불안함에 나는 더 종이로, 권위로, 과거로 도망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래된, 저명 작가의 인쇄물 속으로 도망친다. 이미 과거의 모든 인류가 한마디 씩 보탠 닳고 닳은 ‘클래식’은 그나마 맘 편한 안심지대다. 물론 그렇다고 기껏 쌓은 지식이 내 인생에는 불멸할 것이라고 여겨지던 가련한 명왕성 꼴을 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유의 세계를 현재, 그리고 디지털 문명에 기반한 곳으로 옮겨오는 순간 혼란이 시작된다. 이곳에서는 B급 정보의 산탄총을 모두가 모두에게 난사하고 있는 형국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전쟁터 한가운데로 워프(Warp)되었다. B급 정보는 불확실성이 너무나 커서 늘 의심 표시를 해두어야 한다. 정보의 유통기한은 영원, 평생, 내가 직업을 가진 한, 10년, 8년, 5년 점점 더 짧아지더니 지금은 급기야 내가 텍스트를 읽는 시간, 한 장을 읽는 시간 이내로 줄어들었다. 내가 읽는 인공지능 분야의 논문은 몇 주가 지나면 무의미해 진다. 이 바닥은 누구도 진리라는 말을 쓰지 않는 불확실성의 세계이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열심히 읽는 텍스트, 열심히 본 영상이, 감상한 음악이 쓸모없어진다니 책을 한장씩, 또는 마우스의 스크롤 휠을 까딱까딱 넘기고,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읽은 정보의 획득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예전에는 정말 안그랬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은 74분의 플레이타임으로 300년동안 부동의 클래식 음악 차트 10위를 유지한다. 심지어 연말이 되면 다시 부활한다. 물론 인기있는 연주는 시대에 따라 조금 바뀔 수 있다. 로제의 아파트는 2분의 플레이타임으로 2주 만에 전세계를 휩쓸었지만 2개월 만에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앤디 워홀이 말한대로 15분 만에 유명해질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반대로 15분이면 잊혀지는 세상이다. 로제의 아파트를 감명깊게 들은 누군가가 있다면, 이제 그 경험을 나누는 것은 ‘Out’ dated한 일이다.

다른 많은 것처럼 이 것은 나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럴때 취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전략은 한가지다. 세상의 속도에 올라타서 영원 불멸 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소화한 정보의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그나마 영원 불멸 할 것으로 간주되는 무엇으로 열심히 바꾼다. 사유의 단타, 사유의 Exit plan이 필요하다. MZ스러운 말로 지적 노동 및 산물에 대한 즉시 보상. 연예인을 쫓아 다니는 파파라치들은 정보의 유통기간이 끝나기 전 몰래 찍은 사진을 보정하고 경매를 통해 잡지사에 매각한다. 단 10분 안에 현금화 한다. 한시간이 지나면 이 사진의 가치는 $0가 된다.

앞으로 이런 세태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속성의 업계에서 직업을 구했다면 앞으로 점점 더 빨라지는 지식의 순환과 짧아지는 정보의 유통기간에 따라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 명확해 보인다. 적어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무엇인가를 성취해야 하고, 이 성취를 나를 위한 것이든, 혹은 기업을 위한 것이든 실질적인 무엇인가로 바꾸어내야 한다. 이 성취는 보통 물질적인 재산, 지위와 권력, 학위와 명성, 자격증 심지어 배우자 일 수도 있다. 농담이 아니다. 젊은이들의 시대 정신 중 많은 부분이 이를 달성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가진 많은 불안, 또 다른 사람이 가진 더 많은 불안이 여기서 솟아 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면에 사람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창조한다고도 생각한다.

이를 돌이켜 다시 여유로운, 내가 지금 읽은 것을 평생 곱씹으며 가치있게 간직할 수 있을까? 20대 배운 지식을 평생 가르치면서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노인의 지혜는 다시 칭송 받을 수 있을까? 나는 힘들 것이라고 본다. 세상은 파동으로 해석해야 할 것과, 직진성(Momentum)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는 돌진하며 나가는 것이다. 그 속도와 방향은 어느 임계점을 지나야 변할 수 있지만 아직 그 임계점까지 돌파해보고 싶은 수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다.

잃어봐야 가졌는지 알게 되는 것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잃어봐야 내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젊음, 관계, 우정, 건강 같이 인생의 목표가 될 만한 것들은 가지고 있음에도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어렵다. 이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돈을 주고 살수도 없으며, 누군가에게 자랑하기도 어렵다. 그저 ‘나’를 이루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내게서 떼어놓았을 때의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젊은이가 노년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겠나, 건강한 사람이 병자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겠나. 마치 여자에게 남자의 삶을 상상하는 것만큼 어렵다. 자아는 반분(半分) 하면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오래된 시간은 그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면도날 처럼 날카로운 면으로 색이 다른 점토 처럼 붙어 있는 나의 젊음을 조금씩 떼어낸다. 젊음은 생명력을 읽고 침식처럼 사그라진다. 면을 천천히 조각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낸다. 그 변화는 더뎌서 나는 알기 어렵다. 어제의 나와 오늘은 나는 다르지 않다. 10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그렇지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10년 전의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었음을 문득 알게 된다. 더 발랄할 생기,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미래에 대한 커다란 희망, 앞으로 생겨날 새로운 관계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 더욱 더 충만했었다.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가진 것들을 더 잘 살펴 볼 걸. 이걸 이용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더 해볼 걸.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순간도 10년 후에는 내가 가진 것으로 충만할 것이다. 잃어보지 않고도 내가 그것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것. 그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도 항상 필요하다. 불완전한 나를 마주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라도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이 것이 언젠가 잃어버릴 것이 분명해서 더 소중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