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하나를 다 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유니볼 검은색 하나를 다 썼다. 펜 하나를 끝까지 다 쓴다는 의미는 1300원짜리 물건이 세상에 태어나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 했다는 것 이외에도 내가 무엇인가 크나큰 시련과 시험을 통과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약 1년 가까운 시간동안 사용했던 펜, 깨끗하게 비워진 잉크 공간을 보기 위해서는, 그 동안 혹시라도 펜을 떨어뜨려 펜 끝의 볼을 빠뜨려도 안되고, 어딘가에 칠칠맞게 흘려서 잃어버려도 안된다.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펜을 슬쩍 들고가서 쓰고는 다시 돌려주지 않는 누군가에게 발견 되어서도 안되고 중간에 다른 펜이 더 좋아져서 필통 속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서도 안된다. 마치 화분 하나를 꾸준히 일년동안 가꾸고 돌보아 꽃을 틔웠을때의 그런 느낌이 이 빈 펜 속에서 느껴진다.

이런 단순하고 명쾌한 시험을 나는 좋아한다. 꾸준하기만 하면 달성할 수 있는 확실한 목표들을 하나씩 달성할 때마다 소소한 성취감을 느끼고 그러한 작고 꾸준한 일상들이 모여서 내 삶을 한조각 한조각을 채워나간다. 마치 운동을 매일매일 하는 것처럼, 영어로된 책을 꾸준히 읽어내려가는 것처럼. 내가 하는 일들이 모두 이런 작지만 의미있는 것들이고 하나씩 하나씩 쌓여가는 느낌이 들기를 간절히 바라는 요즘이다.

DSC 0257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