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좋아하는 유니볼 검은색 하나를 다 썼다. 펜 하나를 끝까지 다 쓴다는 의미는 1300원짜리 물건이 세상에 태어나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 했다는 것 이외에도 내가 무엇인가 크나큰 시련과 시험을 통과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약 1년 가까운 시간동안 사용했던 펜, 깨끗하게 비워진 잉크 공간을 보기 위해서는, 그 동안 혹시라도 펜을 떨어뜨려 펜 끝의 볼을 빠뜨려도 안되고, 어딘가에 칠칠맞게 흘려서 잃어버려도 안된다.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펜을 슬쩍 들고가서 쓰고는 다시 돌려주지 않는 누군가에게 발견 되어서도 안되고 중간에 다른 펜이 더 좋아져서 필통 속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서도 안된다. 마치 화분 하나를 꾸준히 일년동안 가꾸고 돌보아 꽃을 틔웠을때의 그런 느낌이 이 빈 펜 속에서 느껴진다.
이런 단순하고 명쾌한 시험을 나는 좋아한다. 꾸준하기만 하면 달성할 수 있는 확실한 목표들을 하나씩 달성할 때마다 소소한 성취감을 느끼고 그러한 작고 꾸준한 일상들이 모여서 내 삶을 한조각 한조각을 채워나간다. 마치 운동을 매일매일 하는 것처럼, 영어로된 책을 꾸준히 읽어내려가는 것처럼. 내가 하는 일들이 모두 이런 작지만 의미있는 것들이고 하나씩 하나씩 쌓여가는 느낌이 들기를 간절히 바라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