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자연’이라는 말을 한자로 풀이해보면 스스로 자自에 그럴 연然을 쓴다. 스스로 그러한 것이 자연이다. 나는 ‘자연’을 대할 때 만족감이나 감동을 인식하고, 이 것이 머리 속의 ‘자연’이라는 글자의 불을 밝히고, 연상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해석까지 다다를때면 과장해서 벅찬 감동까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말 자체의 아름다움과 그런 이름을 붙인 옛 선인의 지혜로움에 감탄한다.

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스스로 그러한 것’을 좋아한다. 이 표현의 안에는 ‘꾸밈이 없다.’, ‘가식이 없다.’, ‘순리대로 거스르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온전하다.’, ‘완전하다.’까지 모든 표현이 꾹꾹 눌러담긴 것 같다. 세상 만물이 모두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지향점이 있다면 바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봄이 되면 하얀 솜털을 달고 피는 녹색 잎에서, 가을이 되면 꼭 필요한 영양소를 줄기에게 포기하고 떨어져버리는 낙엽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와 내 주위, 그리고 지금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 아닌 것이 너무 많다. 그리고 이 것이 위장된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현혹하는 경우도 있다. 본질 보다는 허상을, 완전함 보다는 위태로운 불완전함을 좇는 경우를 보게된다. 많은 이들이 사물의 불완전함과 나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드러내지 못하면 결국 세상 속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은 점점 사라지게 마련이다.

자연스러운 ‘나’, 자연스러운 ‘음식’, 자연스러운 ‘욕구’, 자연스러운 ‘소비’,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자연스러운 ‘죽음’. 나와 사물, 나와 사람, 나와 나의 본질 사이에 아무것도 두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타인이라는 비판적 거울, 재료 본연의 맛을 감추는 조미료, 강요된 타인의 욕구, 필요치 않은 소비, 목적에 의한 만남, 무의미한 연명 치료 들은 내 삶에 허상이라는 불투명한 층위를 쌓는다. 자연스러운 ‘삶’을 방해한다.

절실하게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럴 수 있다면 내가 곧 자연이고 자연 속에서 아무것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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