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마츠야마, 에치고 유자와

오랜만에 쾌적하게 잘 잤다. 캡슐호텔의 시설도 좋았을 뿐더러 사람이 많지 않아 잠을 깨우는 부산한 움직임이 덜했다. 걸어서 마츠야마 성을 보러가기로 한다. 나는 아침을 먹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굳이 조식을 찾아 먹지 않아도 된다. 마츠야마는 어제 묵었던 나고야에 비해 훨씬 고지대이고, 주위가 모두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신선한 공기가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 멀리 보이는 산이 아름답다. 제네바에서 보이던 알프스의 고봉들이 생각났다. 여기서 보이는 산들도 일본 알프스라고 불린다.

역 근처의 숙소에서 성 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8시 30분에 관람이 시작된다고 하여 8시 쯤 출발하기로 한다. 걸어가는 길은 대부분의 일본 시가지가 그런 것 처럼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출근하는 사람, 등교하는 사람이 없다. 여행 내내 늘 시간에 쫓겨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했는데, 8시 30분 도착을 목표로 느긋하게 걸어가본다. 여행의 한가로움을 뽑내며 걸어가는 길에 꽤 커다란 하천을 마주친다. 물이 맑고 수량이 많다. 꽤나 깊은 산에서 내려온 물인 것 같다. 어제 굽이굽이 기차를 타고 지나온 높디 높은 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 인 것 같다. 물을 만져보려 내려가 본다. 햇살과 청량한 물, 이 물이 시작한 산과의 거리감, 그리고 일요일 아침의 여유로움이 합쳐서 행복감을 준다.

다리를 건너가니 개구리일지, 두꺼비일지 모르는 사무라이 동상이 보인다. 이 도시의 마스코트라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코로나 시절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진이 나온다. 자그마한 신사를 마주쳤다. 10대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붉은 빛 치마를 입은 무녀 둘이 청소를 하고 있다. 아침 산책을 나온 나이 많은 부부가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빌고 있다. 무슨 소원을 빌고 있을까. 신사 앞에서 시작하여 하천과 나란히 이어지는 좁은 골목과 상점가가 관광 명소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문을 열지 않았다. 이 길을 이용해 다시 숙소로 돌아와야 하니 오는 길에 들러보기로 한다.

마츠야마 성은 일본에 몇 개 없는 천수가 온전히 보존된 성이다. 구마모토, 나고야, 오사카 성이 겉만 그럴듯한 현대 콘크리트 건축물인데 비해 이 곳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처마와 각 층의 대들보가 온전히 보존된 드문 성이다. 물론 수십년에 한 번 씩 나무를 교체하고 기와를 교체하는 대규모 보수 공사가 지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천천히 걷는다고 했는데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입구를 막아 놓았길래 왼쪽으로 조금 이동해서 성 전체를 조망하는 벤치에 잠시 앉아 있었다. 해자 건너편의 성채가 단정하고 반듯하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입장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겉으로 보면 5층 건물인데, 실제로는 6층이다. 이는 틀림없이 침입자와 수비자 간 수비자가 유리하도록 정보의 비대칭을 만들기 위한 설계일 것이다.

시간에 맞춰 입장이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서양 관광객들이 많았다. 연령대가 다양한 그룹이라 학회 같은 행사에 참석하고 주말 관광차 들린 것 같기도 하다. 히메지 성처럼 성 외곽이나 성문 등을 겹겹이 통과해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문 하나를 지난 후 바로 성 내로 입장할 수 있다. 좁고 좁은 복도와 실내를 통과해서 최상층을 통해 올라간다. ‘총’, ‘대포’ 같은 화기 위주의 전시가 많았다. 기차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천천히 둘러봐도 되겠다 싶었다. 성의 유래나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나무 조각까지 꼼꼼하게 둘러본다. 일본어로는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는데, 영어로는 중요한 한두 문장만 번역해 놓았다. 어느 사이에 바글바글하던 서양인들은 흥미가 사라졌는지 먼저 올라가버렸다.

일본의 총은 포르투갈을 통해 전해졌다. 1500년대 우연히 표류하던 포르투갈 무역선에서 총의 위력을 발견했다. 일본인들은 이를 구입하여 국산화 함과 동시에 화약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된다. 1년 안에 자체 개발 할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던 지역의 영주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앞 다투어 이를 도입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인이 쉽게 소지할 수 있는 짧은 길이의 총에서 부터 두 명 이상이 운용하는 거대한 총신의 총까지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성에서 외부를 향해 발사하는 사구 들도 처음에는 위 아래가 긴 형태로 활을 쏘도록 만들어졌다가, 이후에는 총을 쏠 수 있는 작은 구멍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렇게 발달한 개인 화기들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무자비한 인명 살상에 이용된다.

천수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니 사방 풍경이 모두 내려다보였다. 산 속에 있는 마을이지만 분지 지형 안쪽은 꽤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분화구 속에 있는 것 같은 모습은 아소산에서도 봤던 풍경이고 내 기억에 우리나라에는 쉽게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사방에 하천을 이루고 있다. 마츠야마는 일본 최고의 고추냉이 산지로 유명한데, 사시사철 흐르는 깨끗한 물이 있어 좋은 품질의 고추냉이를 기를 수 있다고 한다. 이 천수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내려오는 길에 달맞이 별관?을 볼 수 있다. 한국어로 정확히 어떻게 지칭하는지 모르겠으나, 영어로는 Moon-viewing Wing으로 번역해 놓았다. 하늘에 떠 있는 달, 해자에 비친 달, 삼면의 열린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 좋은 술이라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되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에 일부러 오면서 들렀던 상점가 거리를 지난다. 여기서는 타이야키, 한국의 붕어빵이 유명하다고 하여 먹어본다. 일요일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별로 없고 이제 막 가게 문을 열고 계셨다. 슈크림과 팥 두 종류를 팔고 있다. 한국보다 훨씬 비싼 값을 받았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막상 받아 든 붕어빵에 오히려 한국 가격이 비싸게 느껴졌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양재천을 연상시키는 천변에 앉아 맛있게 다 먹었다. 여전히 관광객은 몇 없었고 물이 흘러가는 소리만 청량하게 들렸다.

11시 퇴실 시간에 맞춰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딱히 마주치는 사람도 없다. 일요일이라 출장 차 방문한 사람도 없어 보인다. 혹시 다음에 오게되면 다시 숙박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비넷에 넣어 둔 가방을 꺼내어 매고 역으로 걸어간다. 숙소는 고층에 위치하고 저층은 상가로 쓰고 있는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인데, 1층에는 서점과 문구점이 절반 정도를 쓰고 그 외에는 생활 잡화나 전자기기를 파는 상점이 입점해 있다. 어제 늦은 시간, 그리고 오늘 아침의 이른 시간에는 모두 닫혀 있어 들어가보진 못했다. 바로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음에도 호기심에 상가들을 뚫고 반대편으로 나가본다.

서점은 마치 내가 사는 동네의 아주 오래된 상가 건물 1층에 입점 해 있는 것 같은 진열과 광고, 그리고 고객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번 여행을 다니면서 종종 느끼는 순간이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른 풍경 속에 문득 익숙함을 느끼는 미국이나 유럽 여행과 달리 (예를 들면 프랑스 시골에서 기아 자동차를 만난다거나) 일본의 풍경은 대부분 우리나라와 같은데 한 두 부분만 다른 (서점의 신간 서적 안내가 일본어로 되어 있다거나) 점을 포착하게 될 때이다. 서로 상반된 매력이 있다. 전체와 부분, 모든 것과 하나의 차이이다.

점심은 여전히 역전의 마츠야를 먹기로 했다. 간단하게 혼자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여기 뿐이다. 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먹을 만한 곳을 검색해보았지만 어제의 맥도널드와 마츠야 두 가지 뿐이다. 역사 내의 아케이드에도 식당이 있는 것 같았지만 적당한 먹을 거리가 있을지, 기차시간에 맞춰 빠르게 먹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마츠야에서의 식사 시간은 20분을 넘지 않으니까. 키오스크를 이용해 익숙하게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메뉴는 1분 안에 나왔다. 촘촘하게 움직이는 배낭여행자에게는 시간의 예측 가능성이 중요하다.

점심을 먹고 다시 기차에 올라탄다. 어제에 이어 특급 시나노를 타고 나가노까지 간다. 오늘은 운이 좋게 가장 앞 자리를 예약할 수 있었다. 아침이라 선명하게 보이는 계곡이 아름답다. 철길이 대부분 단선 구간이고 중간중간 지나가는 기차역에서 복선 구간이 있다. 따라서 완행 열차들은 잠시 이곳에 멈춰서서 반대편이나 혹은 추월해가는 특급 열차가 지나갈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내가 탄 기차는 거의 멈춰서는 일 없이 모두의 양보를 받으며 질주한다. 왜냐하면 나는 ‘특급’이고 비싼 값을 지불했다. 워낙 산이 깊어 복선으로 철로를 놓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일본은 협궤, 우리나라는 표준궤를 쓴다. 협궤는 표준궤보다 40cm가량 폭이 좁다. 우리나라 철도의 시작도 일본이 부설한 것이므로 자국과는 다르게 표준궤를 선택했다. 이는 당연히 향후 중국과 러시아와의 철도 연결을 고려했을 것이다. 반면 일본은 외부와 철도 연결이 필요 없고 싼 부설 비용으로 산악 지형을 넘나들어야 했으므로 협궤가 적당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대신 객차를 크게 만들지 못해 운송량에 제약이 있고, 곡선 구간에서 일정 속도 이상을 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계곡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는 시나노 특급을 보면서 협궤 말고는 산택지가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칸센은 모두 표준궤로 새로 놓은 철로이다.

나가노에서 다시 다카사키까지 간 후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에치고 유자와 역까지 달린다. 나가노에서 갈아타는 기차가 도착하기까지 15분의 시간이 있길래 역사 밖 육교까지 나가 사진만 찍고 왔다. 동계 올림픽이 열린 도시이고 여름을 앞둔 한 낮의 시간인데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멀리 있는 산들이 깨끗하게 잘 보인다. 호핑 투어는 이럴 때 쓰는 말 같다. 복잡해보이지만 특급 시나노 이후 나가노부터는 모두 신칸센 1등석을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빠르고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다. 지겨울 정도로 신칸센을 탔다. 어제, 오늘, 내일의 이동으로 이미 JR패스 구매 비용 이상의 탑승료에 맞먹는다.

에치고 유자와를 방문하기로 한 이유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 때문이다. 일본인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두 명 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먼저 수상했다. 나는 그의 소설은 설국만 읽어보았지만 그 하얀 풍경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가 참 좋았다. 책을 읽으면서 그 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내가 기록하는 ‘방문 희망 리스트’에 추가 해 놓았었다. 신칸센 자유 이용권이 없다면 꽤나 돈을 들여 와야하는 곳이기에 이 기회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다만 설국이 아니라 파릇파릇한 푸른 나라 였다는 점은 아쉽다. 다른 한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오에 겐자부로이고 그의 책을 초등학생 때 샀다가 100 페이지도 못 읽고 포기했다.

에치고 유자와를 향해 달려가는 신칸센 내에서 숙소를 예약했다. 여름은 비수기라 숙소가 저렴했다. 또 니가타현에서는 방문 외국인을 대상으로 숙소 쿠폰을 뿌리고 있었는데 이 캠페인으로 예약하니 조식/석식이 포함된 다다미방을 5만원 안되는 가격에 예약할 수 있었다. 가장 원했던 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장기간 머무르며 설국을 구상했다는 다카한 여관이었지만 이 곳은 그 유명세 때문인지 이 비수기에도 비싼 가격을 받고 있고 별다른 캠페인도 없었다.

에치고 유자와 역에 내리니 6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서늘했다. 숙소로 가다가 설국 기념관을 관광하고 체크인 하기로 한다. 구글 맵에서는 가까워 보였는데, 숙소까지는 꽤 먼 거리를 걸어가야 했다.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니 오히려 ‘없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정확하겠다. 이 곳에 신칸센이 처음 놓이고 경제가 부흥할 1980년 초반에는 스키리조트가 개발되고 숙소가 우후죽순 생긴 것 같다. 지금은 우리나라처럼 스키의 인기도 많이 줄어들고, 그 때 지어졌던 리조트들이 많이 낙후되고 다른 지역의 경쟁자들도 많이 생겨서 그 때만큼의 호황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 같다.

아뿔싸, 설국 기념관이 보수 공사로 문을 닫았다. 비수기인 여름에 맞춰 내부 공사를 진행하고 겨울에 다시 문을 여는 것 같았다. 걸어오느라 발이 화끈거려 건물 앞 족욕 탕에 잠시 짐을 내려놓고 족욕을 했다. 족욕을 하는 사람도 물론 없다. 물에 떠있는 하얀 각질로 사람들의 흔적을 느꼈다. 가끔 일본 특유의 박스형 경차가 몇 번 지나쳐 갈 뿐이다. 산지 지형이라 숙소로 올라가는 길도 꽤나 오르막이다. 알고보니 내가 예약한 숙소 (유자와 토에이 호텔) 바로 옆에 스키 리프트가 있었다. 겨울에 스키를 타러 온 관광객들은 숙소에서 바로 스키를 들고 나와 탈 수 있게 편리해보였다. 호텔 주차장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단체 관광객을 태우고 역을 오가는 대형 버스들이 몇 대 서있었다.

로비는 꽤 넓었지만 오랫동안 리모델링 하지 않은 색바랜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의 가야산이나 거제 등 예전에 인기가 있을 법한 관광지에, 마이카 붐을 타고 지어진 건물 내부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중년의 아주머니 직원과 그 보다는 약간 젊어 보이는 남자 직원이 있었다. 역시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영어로 체크인을 하겠고 아고다에서 할인 캠페인을 통해 예약했다고 이야기했다. 알겠다고 하고 여권을 달라고 한다. 잠시 뒤 직원이 조식과 석식은 포함되지 않는 숙박 플랜이라고 이야기 했다. 내가 아고다에서 확인한 것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예약한 아고다 예약 기록에는 니가타현에서 진행하는 특별 캠페인으로 조식과 석식을 포함한 플랜이라고 나와있었다. 스마트폰을 들이 밀었고, 영어 대신 일본어를 썼다. 아마 이 호텔에 이 플랜으로 숙박한 사람이 나 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한참을 서류를 뒤적뒤적하더니 알겠다며 조식과 석식을 포함한 숙박이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그들의 실수 인지, 아니면 내가 이야기하고 증거를 들이미니 마지못해 해준 것인지는 모르겠다.

숙소로 올라가 다다미 방에 잠깐 누워있었다. TV를 틀었더니 일본 아이돌이 한국 여행을 하는 프로그램이 하고 있었다. 아침에 김포공항으로 입국해서 그날 저녁에 김포공항으로 출국하는 당일 치기 여행이라고 한다. 나도 힘든 여행을 하고 있지만, 그 여자 아이돌은 하루 종일 저 텐션을 유지하는 것이 나보다 더 힘들 것 같았다. 오늘이 여행 중 유일하게 나만의 TV와 화장실이 있는 숙소였다. 사실 저녁 먹을 시간까지 별로 할 것이 없기에 동네를 한바퀴 둘러보고 오기로 했다. 방금 역에서 관광객이 걸을 만한 ‘설국’ 길이 있다는 것을 지도에서 찾았었다.

설국 길은 여관 다카한으로 가는 길부터 시작한다. 여관 로비에는 설국 관련 전시가 있는 듯 하나, 왠지 투숙객이 아닌데 들어가기 뻘쭘하여 건물만 한바퀴를 돌아보았다. 여관을 지나 신칸센 철로를 거쳐 굽이굽이 동네를 살펴보다보면 여주인공이 일하던 여관이나 설국의 유명한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가 새겨진 기념비도 찾아볼 수 있다. 마을 한바퀴를 돌아 다시 기차역으로 왔다.

기차역으로 온 이유는 이 지방의 사케를 시음할 수 있는 폰슈칸이라는 상점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5백엔을 내면 코인 5개를 주는데 수십개의 사케 자판기 중 원하는 것을 코인 넣어 시음해볼 수 있다. 사케 가격에 따라 코인 한개 부터 세개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사케는 병으로 구입할 수도 있는데 한 병 사고 싶었지만 이를 남은 여행 기간 내내 배낭에 짊어지고 다닐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든 기념품은 삿뽀로에서 사기로 한다. 네 종류의 사케를 나름대로 다른 것들로 골라 먹어보았는데 정말 맛이 달라서 모두 쌀을 기본으로 한 것이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어떤 사케는 상큼한 귤 향이 진하게 느껴지는데, 귤을 진짜 넣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향을 귤로 착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 곳 니가타는 쌀이 유명하고 따라서 쌀로 만드는 사케가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름있는 양조장만 수십 곳이라는 듯.

사케를 병으로 하는 것은 포기하고, 편의점에서 맥주와 몇 가지 간식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저녁은 아래 층에 있는 연회장에서 준다고 해서 내려갔다. 간단하게 숙박 호수를 말하고 들어갔는데, 대부분 단체 관광으로 버스를 타고 오신 정말 나이드신 할아버지, 할머니 뿐이었다. 아, 이 숙소는 비수기에 이런 영업을 하는 구나 싶었다. 거기 앉아있는 유일한 혼자, 젊은이(?)로 일본식 코스요리를 준다고 하여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접객하시는 분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다. 식사는 철저히 와쇼쿠 스타일로 생선, 조림, 된장국, 나베, 흰 쌀밥이 꽤 길게 이어져서 나왔다. 사실 건강식이긴 하겠으나 별로 자극적이지 않은 요리의 끊임 없는 행렬에 금방 질려서 그만 먹고 나갈 수 있는 시간을 노리고 있었다. 결국 후식은 패스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 후 올라와서 조금 쉬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호텔이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해있어 마을 전경이 잘 보였다. 기대했던 설국의 풍경은 아니었다. 빌려주는 유카타를 입고 대욕장에 온천을 하러 갔다. 호텔의 다른 곳은 낡고 오래된 느낌이었지만 탈의실부터 잘 관리되고 있었다. 노천탕으로 나가보았다. 한 명이 있었지만 이윽고 나가버렸다. 배트민턴 코드 정도 넓이의 노천탕에 나 혼자 누워 있었다. 산에서 이름모를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린다. 밤 하늘의 별이 선명하게 보였다. 초 여름이지만 밤에 산에서 내려오는 쌀쌀한 바람이 느껴졌다. 일주일 넘게 진행된 오랜 여행의 피로가 풀린다. 나름 일본 대중 목욕탕을 다녀봐서 그런지 제법 익숙하게 씻을 수 있었다.

숙소로 올라와 다다미 방에서 TV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일본의 새우깡 에비센을 먹으면서 내일의 계획을 조금 생각했다. 문득 깜깜한 밤, 사람이 안보이는 호텔, 4인용 객실에 혼자 잠을 청하는 나. 약간 으시시한 느낌이 들어서 TV를 오랫동안 켜놓고 잠을 청했다. 캡슐 속에서 잠을 자는게 익숙해져서 일까.

내일은 정말 오랜만에 도쿄로 향한다. 정확히 15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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