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기

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컴퓨터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롤플레잉 게임을 즐겨 했다. 그 시절의 롤플레잉 게임에서 나는 중세와 SF 세계관을 적당히 버무린 곳에서 영웅이 되어, 점점 성장하고 강해지고 부자가 된다. 이는 잠시나마 영웅을 꿈꾸는 역할 놀이(롤플레잉)이자 미래 어른이 된 이후의 시뮬레이션처럼 느껴졌다.

어떤 롤플레잉 게임은 아무 때나 저장할 수 있었다. ‘저장’이란 내 소지품 따위를 금고에 넣어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의 모든 것을 저장하는 행위이다. 밥을 먹거나, 학교에 가거나, 잠을 자고 와서 다시 게임을 켜고 ‘불러오기’를 하면 저장한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생각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저장했다. 험난한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는 꼭 저장해서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책갈피를 꽂아 두었다. 가능한 한 자주 저장하는 것이 했던 퀘스트나 미로 찾기, 몬스터를 잡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지 않게 해 주는 좋은 방법이었다.

까다로운 게임들은 어느 위치에 도달해야 저장할 수 있었다. 주로 저장할 수 있는 곳은 바닥이 푸른색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게 점멸하거나, 기괴하게 생긴 그리스 조각상 앞이었다. ‘여기는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야, 더 진행하기 전에 여기서 꼭 저장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독특해서 지나칠 수 없는 오브제 위에서 저장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위치는 모든 변수가 정리된 마일스톤이었다. 복잡한 것을 끝내고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는 지점에 저장할 수 있었다. 이는 저장 공간을 아끼기 위해서일 것 같다.

까다롭긴 해도 내가 한 게임 중에 저장이 안 되는 게임은 없다. 아마 그런 황당한 게임은 그때나 지금이나 없을 것이다. 어떤 괴짜가 제작비나 투자비를 모두 날려먹을 생각으로 만들어 낼 순 있겠다. 똑같은 괴짜들이나 살 것이고 정상적인 게이머에게는 하나도 안 팔릴 것을 가정해야 하겠다. 웬만한 롤플레잉 게임은 끝까지 준비해 놓은 모든 것을 즐기는데 최소한 40~50시간이 걸린다. 이 동안 계속 게임만 하거나, 계속 컴퓨터나 게임기를 켜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천재지변과 예상치 못한 스케줄, 그리고 참을성 없는 부모님이 있을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현실의 삶에는 저장하는 기능이 없다. 앞으로 나가기 어렵고, 해답을 알지 못해 답답하고, 오랜 도전 끝에 쉬고 싶고, 현실 세계의 던전에 들어가는 용사와 같은 입장에서도 다시 부활을 위해 현재를 저장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 블랙홀을 찾을 수는 없고 그리스 조각상도 내게 ’정말 저장하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지 않는다. 니체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않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강함은 온갖 고생과 시간의 낭비,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내가 보살펴야 할 사람들의 고통까지 소환하게 되는 것이다. 롤플레잉 게임처럼 내가 강해졌는지 수치로 확인할 수도 없다.

잠시 쉬어도,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도미노를 쌓거나 레고를 조립하거나 둘레길 코스를 하나씩 돌파하는 것처럼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도 언젠가 그 자리에서 변함없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멈춘 자리의 모든 것이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간단히 확인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2번 베이스캠프에 도달하고 하루를 자면 다시 2번 베이스캠프이어야 한다. 1번 베이스캠프로 미끄러지는 일이 왕왕 일어난다면 쉽게 잠들 수 없으리라. 확신을 가진다면 더 과감하게 말하거나, 집을 떠나 멀리 가보거나, 위험한 일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가진 많은 것들은 삶 자체의 변화와 소멸로의 일방적 흐름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반복성의 부재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기 어렵다. 온전히 홀로 하는 도미노가 아닌 것이고, 잠시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의 실수로 무너질지, 완성되어 넘어뜨리는 희열에 소외될지, 새로운 판을 시작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관계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많은 성취들이 그렇다. 태초에 멈춤이 자연스럽지 않다. 그간 삶 가운데 조금의 멈춤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 왔지만 밤의 안락함과 주말의 휴식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몸의 절반쯤을 담그고 있는 사회가 이러한 멈춤을 용납하지 않는 거센 물결이라면, 적어도 삶의 나머지 절반쯤에 있어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차근차근 누적해서 성취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내 시간의 절반은 떠밀려 내려가지 않게 계속해서 발장구를 치고, 팔을 내뻗는다면, 나머지 절반의 시간에서는 나의 성취를 확인하고, 단단히 몸을 고정시키고, 주위의 경관을 살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나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채로 방향성 없이 해류에 떠밀려 표류하는 쓸모 없음과 무엇이 다른가.

삶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온전히 저장하는 게임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중 중요한 몇 가지는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해 보려고 한다. 이 롤플레잉에 심취 했을 때 더 재미있는 나만의 게임을 만들고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추억이 있다. 이러한 재능이 지금이라고 발현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겠지. 

공간과 행위

주방에 설치된 식탁 등 위치를 조금 옮겨 달았다. 우리 가족은 내 나이 만큼의 아파트 내부를 고쳐 살고 있다. 아주 오래된 아파트라는 뜻이다. 처음 입주할 때 부터 식탁등 위치가 애매했다. 원래는 식탁 자리였을 것이다. 주방을 고치면서 아일랜드를 짜고 식탁을 거실쪽으로 1.5미터 정도 옮겨 놓은지라 조명이 아일랜드 위에 달리게 되었다. 요리를 자주 하지 않는 우리에게는 쓰일 일이 없는 조명이었다. 다만 거실 등을 끄고 켜놓으면 노란 백열 전구라 집안 전체에 따뜻한 느낌을 준다.

우리집 인테리어를 해주셨던 아저씨를 불러 몇 만원 주고 이 조명을 식탁위로 옮겨 달았다. 요즘 아파트와 다르게 천정이 벽지바른 콘크리트 인지라 맵시있게 전선을 숨길 수 없었다. 쫄대를 1.5미터 정도 이어 천정에 붙이고 안쪽으로 전선을 연장하여 넣었다. 쫄대를 하얀색으로 선택해 그나마 티가 덜 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뜯어진 벽지도 적당히 마감했다. 천장을 올려다볼 일은 드무니까 괜찮아 보였다.

원래는 밥을 밝게 먹자는 의도였다. 조명이 있으면 반찬도 한층 더 맛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뿐이 아니었다. 몇 만원이 주는 변화는 놀라웠다. 예전에는 소파와 방, 침대 위에서 책을 보거나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던 가족이 식탁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늘었고, 식탁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간 둘러 앉을 만한 공간이 없었는데, 밝은 공간 속에서 집중할 수 있게 되므로 생긴 변화다.

우리는 의지로 행동을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이는 쉽지 않다. 하나의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 품고 있어야 하는 의지의 크기는 크고 기간은 상당히 길다. 이번 일을 계기로 새삼 깨닿는다. 그래, 훨씬 쉬운 방법이 있다. 우리가 가진 물리적 공간을 바꾸는 것이다. 조명을 옮겨 달거나, 가구의 위치를 바꾼다. 또는 에어팟을 처분하거나, 벽에 그림을 걸거나 핸드폰 충전기의 위치를 고정해 놓는다.

공간과 사물은 당연하게도 나의 행동과 연관된다. 내 행동을 유도할 수 있게 ‘섬세한 공간 설계’를 해보면 꽤 많은 좋은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명 위치를 바꾸어 달았던 경험처럼 의도치 않은 긍정적인 방향도 좋지만 이를 영리하게 적극적으로 활용해보고 싶다. 외적인 것으로부터의 변화이다. 형이상학을 낮추고, 형이하학을 높인다. 관념의 세계에만 머무는 어떤 것도 내 삶에 큰 의미가 없지 않은지 알량한 유희에 불과하지 않은지 의심이 든다.

영어의 force someone to ~ 표현이 생각난다. 동사로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억지로 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명사로는 물리력, 물리적인 힘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의지, 설득, 교육으로 바꿀 수 있는 변화도 있지만, 반드시 Force 가 필요한 혹은 효과가 매우 좋은 변화도 많아 보인다. 다른 이에게도 또 나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