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만큼 쓰기

균형은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세상 모든 것에 스며 있다. 균형은 어떤 모습을가진 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물이 평화롭게 수십, 수 백 년, 영원의 시간이 흐르면 다다르는 곳을 균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 이후 내 삶에 균형을 전면적으로 도입 하기로 했다. 균형이 있는 삶이란 강렬하게 열망하지 않고, 깊고 까만 구멍만큼 실망하지도 않는다. 수천년을 살아온 듯한 완벽하게 균형 잡힌 삶, 고요한 새벽의 수영장 같은 삶 위에서 의도된 움직임과 물결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읽는 만큼 쓰기’

나는 많은 책을 읽고 있다.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된 이후, 일년에 36권 이상 책을 본다. 하지만 읽기만큼 쓰지 않아 ‘지적 소화 불량’ 상태에 걸려 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 미래에 꼭 다시 곱씹어 볼 화두 들을 정리해야 한다. 정리된 내용은 적어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 생각은 새벽에 깨어난 꿈과 같아서 수 분이 지나면 다시 책 속으로 숨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읽는 시간과 쓰는 시간이 같은 것은 아니다. 물리적 균형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읽으면서 충분히 생각하고, 이 생각의 결정만큼 쓰는 것이 좋겠다.

‘먹는 만큼 운동하기’

사람은 먹은 만큼 움직일 수 있다. 움직인 만큼 먹어야 한다. 의도치 않게 먹었다면, 그 만큼 움직어야 한다. 일년에 한 개를 먹는 초코렛 때문에 살이 찐다는 이야기가 있다. 많이 먹은 만큼 운동을 해야 하고, 균형을 무너뜨린 조그만 초코바 하나를 먹으면 초코바 하나 만큼 운동을 하겠다. 반대로 운동을 한 만큼 먹는 것도 균형이다. 등산은 포식을 허락한다. 

 ‘공부한 만큼 만들기’

나는 과거의 내가 못하던 것을 할 수 있게 되기  위해 공부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아는 것 많지만 이를 이용해서 세상에 이뤄놓은 일이 없다면, 그건 놀이다. 지적 놀이나 허영의 충족, 즉 유희다. 이런 헛똑똑이들이 세상에는 많다. 나도 어느 분야에서는 그 중 한명일지 모르겠다. 지금은 공부한 만큼 바꾸어 놓기 위해 힘을 쏟는다. 내가 공부한 만큼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볼 것이다. 그것이 내 공부의 의미이다.

‘혼자인 시간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나는 혼자 있을 때 행복하다. 혼자 만의 시간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사회적 경계를 조금 더 넓혔을 때 행복해지는 경험을 더 해보고 싶다.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다. 삶에서 중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나의 성장이지 관계의 성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충분히 혼자 있는 시간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함께하는 시간과의 균형을 맞추려면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행복한 친구가 근처에 있고 자주 만난다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

‘집 안에 있는 시간과 집 밖에 있는 시간’

나는 주말의 루틴을 밖에 있는 시간과 집에 있는 시간의 절반으로 나누어 계획해 본다. 밖에 있는 시간은 산책, 등산, 자전거, 운동, 도서관, 까페, 여행, 식사 등이다. 집 안에 있는 시간은 독서, 낮잠, 요리, 청소, 보드게임, 공부, 글쓰기 등이다. 두 가지 상반되는 활동들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여기서도 시간의 균형 보다는 에너지의 균형을 찾는다. 2시간의 자전거와 1시간의 낮잠이 등가다. 신체적 활동과 두뇌 활동으로 나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뭐가 되든 좋다. 대척점에 있는 것을 절반씩 섞으면 된다. 

‘세속적인 시간과 철학적인 시간’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시간이 있다. 현실적인 문제라 함은 은퇴 이후의 경제적 삶이나, 자산을 불리기 위한 재테크일 수도 있다. 고장난 자동차나 자전거의 수리도 포함된다. 또 쇼핑이나 장을 보는 일 일수도 있다. 반면 철학적인 시간이라 함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이다. 양쪽 모두 포기할 수 없다. 삶의 현실적인 풍요과 가족이 누리는 순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세속적인 것이 중요하다. 내 삶의 완성과 지향점을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양쪽을 잘 조화시켜 세속적인 결정에 철학적 고민이 스며들고, 철학적 판단이 세속적인 판단을 지향하기를 바란다.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기

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컴퓨터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롤플레잉 게임을 즐겨 했다. 그 시절의 롤플레잉 게임에서 나는 중세와 SF 세계관을 적당히 버무린 곳에서 영웅이 되어, 점점 성장하고 강해지고 부자가 된다. 이는 잠시나마 영웅을 꿈꾸는 역할 놀이(롤플레잉)이자 미래 어른이 된 이후의 시뮬레이션처럼 느껴졌다.

어떤 롤플레잉 게임은 아무 때나 저장할 수 있었다. ‘저장’이란 내 소지품 따위를 금고에 넣어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의 모든 것을 저장하는 행위이다. 밥을 먹거나, 학교에 가거나, 잠을 자고 와서 다시 게임을 켜고 ‘불러오기’를 하면 저장한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생각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저장했다. 험난한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는 꼭 저장해서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책갈피를 꽂아 두었다. 가능한 한 자주 저장하는 것이 했던 퀘스트나 미로 찾기, 몬스터를 잡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지 않게 해 주는 좋은 방법이었다.

까다로운 게임들은 어느 위치에 도달해야 저장할 수 있었다. 주로 저장할 수 있는 곳은 바닥이 푸른색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게 점멸하거나, 기괴하게 생긴 그리스 조각상 앞이었다. ‘여기는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야, 더 진행하기 전에 여기서 꼭 저장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독특해서 지나칠 수 없는 오브제 위에서 저장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위치는 모든 변수가 정리된 마일스톤이었다. 복잡한 것을 끝내고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는 지점에 저장할 수 있었다. 이는 저장 공간을 아끼기 위해서일 것 같다.

까다롭긴 해도 내가 한 게임 중에 저장이 안 되는 게임은 없다. 아마 그런 황당한 게임은 그때나 지금이나 없을 것이다. 어떤 괴짜가 제작비나 투자비를 모두 날려먹을 생각으로 만들어 낼 순 있겠다. 똑같은 괴짜들이나 살 것이고 정상적인 게이머에게는 하나도 안 팔릴 것을 가정해야 하겠다. 웬만한 롤플레잉 게임은 끝까지 준비해 놓은 모든 것을 즐기는데 최소한 40~50시간이 걸린다. 이 동안 계속 게임만 하거나, 계속 컴퓨터나 게임기를 켜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천재지변과 예상치 못한 스케줄, 그리고 참을성 없는 부모님이 있을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현실의 삶에는 저장하는 기능이 없다. 앞으로 나가기 어렵고, 해답을 알지 못해 답답하고, 오랜 도전 끝에 쉬고 싶고, 현실 세계의 던전에 들어가는 용사와 같은 입장에서도 다시 부활을 위해 현재를 저장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 블랙홀을 찾을 수는 없고 그리스 조각상도 내게 ’정말 저장하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지 않는다. 니체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않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강함은 온갖 고생과 시간의 낭비,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내가 보살펴야 할 사람들의 고통까지 소환하게 되는 것이다. 롤플레잉 게임처럼 내가 강해졌는지 수치로 확인할 수도 없다.

잠시 쉬어도,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도미노를 쌓거나 레고를 조립하거나 둘레길 코스를 하나씩 돌파하는 것처럼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도 언젠가 그 자리에서 변함없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멈춘 자리의 모든 것이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간단히 확인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2번 베이스캠프에 도달하고 하루를 자면 다시 2번 베이스캠프이어야 한다. 1번 베이스캠프로 미끄러지는 일이 왕왕 일어난다면 쉽게 잠들 수 없으리라. 확신을 가진다면 더 과감하게 말하거나, 집을 떠나 멀리 가보거나, 위험한 일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가진 많은 것들은 삶 자체의 변화와 소멸로의 일방적 흐름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반복성의 부재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기 어렵다. 온전히 홀로 하는 도미노가 아닌 것이고, 잠시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의 실수로 무너질지, 완성되어 넘어뜨리는 희열에 소외될지, 새로운 판을 시작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관계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많은 성취들이 그렇다. 태초에 멈춤이 자연스럽지 않다. 그간 삶 가운데 조금의 멈춤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 왔지만 밤의 안락함과 주말의 휴식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몸의 절반쯤을 담그고 있는 사회가 이러한 멈춤을 용납하지 않는 거센 물결이라면, 적어도 삶의 나머지 절반쯤에 있어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차근차근 누적해서 성취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내 시간의 절반은 떠밀려 내려가지 않게 계속해서 발장구를 치고, 팔을 내뻗는다면, 나머지 절반의 시간에서는 나의 성취를 확인하고, 단단히 몸을 고정시키고, 주위의 경관을 살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나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채로 방향성 없이 해류에 떠밀려 표류하는 쓸모 없음과 무엇이 다른가.

삶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온전히 저장하는 게임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중 중요한 몇 가지는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해 보려고 한다. 이 롤플레잉에 심취 했을 때 더 재미있는 나만의 게임을 만들고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추억이 있다. 이러한 재능이 지금이라고 발현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