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자연’이라는 말을 한자로 풀이해보면 스스로 자自에 그럴 연然을 쓴다. 스스로 그러한 것이 자연이다. 나는 ‘자연’을 대할 때 만족감이나 감동을 인식하고, 이 것이 머리 속의 ‘자연’이라는 글자의 불을 밝히고, 연상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해석까지 다다를때면 과장해서 벅찬 감동까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말 자체의 아름다움과 그런 이름을 붙인 옛 선인의 지혜로움에 감탄한다.

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스스로 그러한 것’을 좋아한다. 이 표현의 안에는 ‘꾸밈이 없다.’, ‘가식이 없다.’, ‘순리대로 거스르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온전하다.’, ‘완전하다.’까지 모든 표현이 꾹꾹 눌러담긴 것 같다. 세상 만물이 모두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지향점이 있다면 바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봄이 되면 하얀 솜털을 달고 피는 녹색 잎에서, 가을이 되면 꼭 필요한 영양소를 줄기에게 포기하고 떨어져버리는 낙엽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와 내 주위, 그리고 지금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 아닌 것이 너무 많다. 그리고 이 것이 위장된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현혹하는 경우도 있다. 본질 보다는 허상을, 완전함 보다는 위태로운 불완전함을 좇는 경우를 보게된다. 많은 이들이 사물의 불완전함과 나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드러내지 못하면 결국 세상 속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은 점점 사라지게 마련이다.

자연스러운 ‘나’, 자연스러운 ‘음식’, 자연스러운 ‘욕구’, 자연스러운 ‘소비’,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자연스러운 ‘죽음’. 나와 사물, 나와 사람, 나와 나의 본질 사이에 아무것도 두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타인이라는 비판적 거울, 재료 본연의 맛을 감추는 조미료, 강요된 타인의 욕구, 필요치 않은 소비, 목적에 의한 만남, 무의미한 연명 치료 들은 내 삶에 허상이라는 불투명한 층위를 쌓는다. 자연스러운 ‘삶’을 방해한다.

절실하게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럴 수 있다면 내가 곧 자연이고 자연 속에서 아무것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에필로그

삿뽀로를 떠나는 날이다. 오후 5시 45분의 에어부산 비행기로 동해를 건너 세시간을 날아 8시 45분에 인천에 떨어진다. 에어부산이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삿뽀로 노선에 다시 취항하는 날이고 첫 날이라고 한다. 열흘간 잘 쓰던 만능 JR패스는 어제로 끝났다. 다시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 아케이드를 걸어갈 자신은 없어 공항까지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한다. 스스키노는 번화가로 공항까지 가는 버스가 자주 온다. 오후 3시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면 공항에서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질 것 같다. (사실 공항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았다)

마지막 날은 긴 이동도 없고, 정해놓은 할 일도 없는지라 삿뽀로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구글 맵을 켜고 반경 1~2km 내 있는 관광지를 찾아본다. 그 중에 정부청사, 삿뽀로 시계탑 건물, 삿뽀로 TV타워 그리고 나카지마 공원을 보기로 한다. 2km 반경 밖에 있는 삿뽀로 맥주 박물관도 가고 싶었지만 모처럼 늦게까지 아침잠을 즐긴터라 다녀올 시간이 되지 않았다. 숙소 앞 메가동키에서 여러가지 둘러보며 살 것도 있었다.

아침 산책 겸 숙소를 나서 북쪽으로 올라간다. 어제의 그 불야성은 온대간데 없고 조용하게 유치원생들이 등하교 하는 길처럼 보인다. 부산스러운 출퇴근 길은 이미 시간이 지났다. 걸어서 십오분 쯤 가면 빨간색의 고풍스러운 정부 청사가 보여야 하나, 전면 리모델링 공사 중이라 가림막을 친 터라 건물 자체는 볼 수가 없었다. 가림막에 건물 모습을 대강이나마 인쇄해놔서 형태는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럴 바에야 구글 맵에 수 많은 사람들이 올려놓은 실제 사진을 참조하는 편이 나으리라.

조금 더 올라가면 삿뽀로 역이지만 이제 더 그 쪽으로 갈일은 없다. 내가 걸어온 길 아래로 어제의 거대한 지하 아케이드가 위치해있다. 청사에서 시작해 이번에는 시계탑 건물, 오도리 공원, TV 타워를 쭉 훑으며 내려 온다. 오도리 공원은 좌우가 긴 형태로 여의도 공원처럼 옛날 비행기 활주로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TV 타워는 에펠탑과 비슷하게 생겼다. 다분히 참고해서 지었을 것이다. 한바퀴 돌았더니 배가 슬슬고파 오늘길에 나카우에 들러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이번 여행 식사의 절반은 마츠야, 요시노야, 나카우에서 때웠다. 숙소 쪽으로 오는 길에 공항버스 정류장과 시간표를 확인했다.

공항 버스를 탈 때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았기에 나카지마 공원에 다녀오기로 한다. 스스키노에서 쭉 남쪽으로 15분~20분 정도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커다란 공원이다. 가운데 호수가 있는 산책길을 쭉 둘러 걸을 수 있는데 평일 오전인지라 주로 놀러나온 유치원 어린이들을 볼 수 있었다. 유명한 클래식 음악 콘서트 홀도 있고, 홀 앞에는 뜬금 없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동상도 있다. 동상의 키가 작은 것은 나름대로 현실고증인가 싶었다.

호헤이칸이라는 140년 된 옛날 호텔도 있다.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도색된 건물 외벽이 겨울에는 눈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헤이칸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빵을 뜯어 먹으며 여행을 복기해봤다. 방문했던 곳, 먹었던 음식, 탔던 기차와 지나친 역, 도시와 자연의 풍경,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 짧은 시간이지만 한반도보다 훨씬 큰 크기의 공간 속을 누비고 다니며 좌충우돌했던 것이다.

다시 숙소 근처의 메가 동키, 돈키호테 매장 중에 건물 하나를 통으로 쓸 정도로 큰 매장, 으로 와서 남은 현금을 이용해 몇 가지 기념품을 샀다. 이치란 인스턴트 라멘, 이토엔 녹차, 아들을 위한 초코 과자 류. 파스모에 충전한 것 중 남은 현금은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는데 쓴다. 마치 유산을 정리하는 노인 같다. 메가 동키 지하 일층 코인록커에서 아침부터 맡겨놓은 배낭을 찾아 둘러매고 공항 버스를 타러 갔다. 5분 정도 기다려서 정시에 도착한 친절한 버스를 타고 간다. 세계 여러나라 버스들을 타봤지만 우리나라 공항버스만큼 편하게 탈 수 있는 것이 없다. 친절과는 별개로 등받이가 너무 서있어 마치 이코노미석에 타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 다음 일정은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공항에서 맥주를 좀 사고 한참의 기다림, 수 많은 커플과 함께하는 귀국길, 일본과 대비되는 편리한 공항버스, 현관문의 열림과 이미 잠든 아들의 얼굴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풍경이다. 오랜만에 내가 자랑하는 포근한 내 침대에서 온기를 느끼면서 잠이 들었다. 새벽에 잠깐 깼을 때는 마치 엄청나게 긴 꿈을 꾸다가 잠깐 눈을 뜬 느낌이 들었다.

여행의 시작에서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출발했다. 충분히 혼자하는 여행을 즐긴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같이 하는 여행에 비해 즐거움과 추억은 덜하다. 이 글도 나를 위해 쓰는 것이고 공감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같이 하는 여행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을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현실의 나는 점점 내가 원해서 쓸 수 있는 나의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여행 속의 나는 내가 원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전부가 된다는 것, 그런 경험과 여행이라는 것이 참 좋았다. 이번 여행은 마무리 하였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다시 혼자하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아, 그리고 정산해보니 항공권 20만원, JR패스와 교통비 50만원, 숙박 40만원, 기타 잡다한 비용 60만원 정도로 170만원의 여행이었다. 혼자 고생하는 여행이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