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는 어느 곳일까? 종교라면 명동성당과 같은 각자의 ‘성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성지는 어디인가? 고조선과 단군 신화를 믿는 분들은 마니산 참성단일 수 있다. 현대사를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은 경복궁이나 서울시청, 광화문 광장 등을 꼽을 수도 있겠다. 또 서울시 동작구 현충원도 근처에서는 경적도 울리지 말라는 안내가 있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다. 조선시대의 왕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종묘도 중요 사적이다. 내가 가본 곳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지 답다’ 느낀 곳은 아산 현충사이다.
그러면 일본의 성지는 어디일까? 일본은 왕이 있는 나라고 이것도 하나의 종교라고 간주하면, 그 최고의 성지는 아마 이세신궁이 될 것이다. 이 곳에는 일본 천황가의 시조라고 여겨지는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신사이자, 전국 신사들의 최고 정점에 있는 황대신궁이 위치해있다. 바로 그 위치에, 나고야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남짓 가야하는 이 곳 이세시에 최고신 아마테라스가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따라서 이 곳은 천황가를 신성시하는 일본 보수의 심장이자 총 본산이다. 이 곳은 천황 만이 공물을 바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일본 왕가에 내려오는 청동검, 거울, 옥 구슬인 삼종신기를 아마테라스가 천황가문에 수여했다는 전설도 있다. 그리고 이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거울이 이세신궁에 있다.
아침 일찍 다시 짐을 싸들고 숙소에서 나왔다. 이세신궁에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나마 가까운 오사카, 교토, 나고야에서 모두 상당히 거리가 있다. 나고야에서는 JR 미에 특급을 타면 1시간 40분이 걸린다. JR패스로는 대부분 무료이지만 중간에 사철을 이용하는 일부 구간이 있어 400엔 정도를 징수한다. 사철 구간이 시작되면 JR 승무원이 돌아다니면서 검표하는데 JR패스를 보여주면 돈을 더 내라고 한다. 가기 어려운 만큼 이 곳이야 말로 내가 생각한 방문 원칙에 부합한다. 이번 여행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며, 한국인이 거의 방문하지 않는 곳이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방문기가 몇 올라오긴 하지만, 에베레스트를 트래킹하는 한국사람보다 훨씬 적은 것 같다.
나고야역에서 7시 40분 출발하는 ‘미에’라는 특급열차를 타기로 한다. 나고야 역사 안에 있는 까페에서 빵을 사서 하나 먹고, 혹시 배가 고플까봐 다른 빵집에서 빵을 두 개 샀다. 물도 하나 샀다. 짐은 나고야역 코인라커에 하루 종일 맡기기로 했다. 특급 미에 열차에는 나이가 지긋한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다. 하긴 젊은이가 두 시간씩 기차를 타고 할 것이라고는 신사 구경 밖에 없는 곳에 왜 가겠는가. 대부분 신사 참배를 가는 분들이다. 긴 시간 타고 가야 하는데 혹시 사람이 많아 자리에 앉지 못할 까봐 지정 좌석권을 따로 구입했다. 물론 JR패스가 있어도 이 좌석권은 돈을 더 내야 한다. 열차 안에는 일부 구간이 나뉘어 있고 앞 쪽은 지정석이다. 뒤쪽에 구역에 자리가 없어 서 있어도 앞쪽으로는 넘어오지 않는다. 미니 설국열차 같다.
나는 이세시에 두 시간 밖에 머물 수 없다. 오후에 나고야성을 보고 오후 늦게는 마츠야마까지 이동해서 숙박을 해야 한다. 하루에 장거리 특급 열차를 세번 타야 한다. 일정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이세신궁은 보통 내궁과 외궁으로 나뉘는데, 외궁은 이세시 역에서 걸어갈 정도로 가깝지만 내궁은 버스를 타고 꽤나 가야한다. 일반적인 경건한 마음의 참배객들은 외궁을 먼저 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내궁으로 가는 것 같지만 나는 내궁을 먼저 이동해서 살펴보고 시간이 남으면 역 근처의 외궁을 보기로 한다. 만약 시간이 모자라면 외궁은 패스하고 나고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세시에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린다. 쉬운 한자로 ‘내궁’이라고 써 있어서 다행이다. 혼란스러운 것은 따로 있다. 버스를 앞에서 타고 뒤로 내리는 것일까, 아니면 뒤로 타고 앞으로 내리는 것일까. 일본도 지역마다 다른지 지역 별로 정리해 놓은 문서가 검색된다. 에스컬레이터도 오사카 사람과 도쿄 사람은 서로 다른 편에 서서 탄다. 기다란, 다른 민족이 서로 섞여 사는 나라라 관습도 지역별로 상당히 차이가 난다.
버스를 타고 생각보다 오랜시간 달려간다. 사람이 많아 보이는 마을은 없어 보인다. 이세시의 교외를 달려 넓고 깨끗한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내궁으로 가려면 상징과도 같은 우지바시라는 커다란 목조 다리를 지나 들어가게 되는데, 다리 앞에는 커다란 주차장이 또 별도로 있다. 얼마나 많은 방문객들이 오는지 짐작이 간다. 품이 넉넉한 까만색 정장과 노타이 차림의 할아버지들과, 가죽 자켓의 큰 소리나는 오토바이를 탄 마초들이 뒤섞여 있다.
다리를 건너 내궁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침 일찍 비가 와서 더욱 진해진 신선한 녹색의 내음과 바둑알 크기의 자갈이 깔린 길에서 나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다. 하나 같이 깨끗한 옷차림에 정중한 몸가짐이다. 누구도 서두르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정원이 만명 쯤 되는 초등학교의 학부모 참관 수업에 가는 느낌이다. 일찍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은 도리이를 지날 때마다 돌아서서 목례를 한다. 아마 어떤 신에게 무엇인가 빌고 있겠지. 나는 종교는 없지만 성당이나 사찰에서 기도를 하거나 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없겠다. 나 뿐 아니라 드문드문 보이는 목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 외국인 관광객 일 것이다.
깨끗한 물이 진입로 옆으로 흐른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여 물고기가 산다면 숨을 곳이 없을 것 같다. 이 정도 깨끗한 물과 수량을 가지고 있는 곳은 한국에서 보기 어려웠다. 확실히 한국보다 젊은 땅이다. 참배 전에 이곳에서 손을 씻거나 하는 것 같다. 일본의 신사 앞의 물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손을 씻거나 입을 헹구는 용도다. 더 걸어 들어가 내궁에 다다른다. 크게 건물 몇 동이 있는데, 각자 다른 신을 모신다고 한다. 그 중 가장 깊숙하고 사람이 많은 곳이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신사이다. 이곳만은 가까이 접근이 불가능하고 사진 촬영도 금지된다. 특별히 예약한 소수 인원만 내부자의 인도하에 직접 참배가 가능한 것 같다. 특별히 더 잘 차려입은 중년의 남성들이 신관 복장을 한 남자의 인도를 받아 건물의 더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다. 초등학교 동창생 보다는 중견 기업 임원처럼 보였다.
그 유래와 상징성과 다르게 건물 자체는 초라해 보인다. 건물 자체에 덧붙여진 화려한 장식 등은 전혀 없으며 딱히 역사나 고풍이 깃들어있지도 않다. 심지어 나무도 새것 같다. 이는 ‘식년천궁’이라는 독특한 관습 때문이다. 20년마다 새로 건물을 짓고, 기존 건물은 허물어버린다. 즉, 지금 건물도 최대 20년 이내 지어진 것 이라는 의미다. 한국에서는 허가되지 않는 재건축 방식이다. 이런 20년 주기의 재건축과 이주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아 보이는데, 나는 이러한 반복 행위 자체가 그 영원성과 관련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돌아다니다 보면 오랜 역사 때문인지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 들이 많다.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세 개의 작은 돌을 모아 놓은 곳인데, 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어진다고 한다. 건물을 이전하여 지을 위치를 표시해 놓는 곳이라는 설명을 나중에 읽었다. 따뜻한 기운이 나온다고 해서 사람들이 손을 올려보고 있었다. 나도 손을 올려 보았는데 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서 조금 신기했다. 현대에 와서 미신이나 전설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눈으로 보는 사물과 엮어내어 만든 이야기들이 없다면 여행을 다니는 재미는 많이 떨어질 것 같다. 수 천년을 믿어온 전설, 전승, 미신, 옛 이야기 들이 최근 몇 백년 사이에 모두 것이으로 부정 당하고 있다. 그 몇 백 년 사이의 지식이 영원할 것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다시 버스를 타고 외궁으로 향한다. 정확하게는 역으로 돌아와서 역에서 다시 시작한다. 외궁은 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 내궁보다는 그 번잡함이 훨씬 덜했다. 아침 이른시간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여기도 관광 침체기를 겪고 있는지 문을 연 상점 들이 많이 없어 보였다. 깨끗하고 꼼꼼하게 빈틈없이 커다란 돌로 메꾸어진 길이 걷기 편했다. 하지만 만약 시간이 없다면 내궁만 보고 외궁은 꼭 보지 않아도 좋겠다. 관리 상태나 사람들, 볼거리, 숲의 울창함 등 모든 것이 외궁은 내궁만 못했다. 모든 것이 내궁의 복제로 보여 휙 둘러보고 다시 역으로 향했다.
다시 역으로 걸어간다. 시간이 남았길래 최단거리로 가지 않고 빙 둘러 가기로 한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파스모 카드를 충전하고, 삼각김밥 하나를 사서 역전 벤치에 앉아 먹었다. 역에서는 끊임없이 참배객들이 나오고 버스는 이들을 가득채워 내궁으로 달려간다. 서둘러 본 탓에 다행히 두 시간안에 모두 둘러보고 열차 출발 까지는 십분 정도가 남아있다. 아침에 사온 빵이 남아있지만, 더 이상 빵으로 배를 채우기 싫었다. 또 빵은 열차 안에서 먹어도 괜찮은 것 같지만 삼각김밥은 부스럭거리는 것이 왠지 민폐 같았다. 여행 시작할 때 후쿠오카의 오호리 공원에 앉아서 한가함을 즐긴 후 이런 여유를 가져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다시 특급 미에 기차에 올라탔다. 가는 길보다 오는 길이 더 길게 느껴진다. 한참을 달려 나타난 나고야 역과 그 근처의 고층빌딩 군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그곳까지 이어진 철도를 따라가는 길 위에서 나는 우주 정거장에 도킹하는 우주선에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고야 역에 도착하기 조금 전에 이치란 라멘을 먹어보기로 결심했다. 정작 본고장인 규슈와 후쿠오카에서는 먹지 않고 나고야에 와서 처음 접해본다. 후쿠오카에서는 그 끔찍하게 긴 웨이팅 후기를 보고는 도저히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2시가 넘은 애매한 시간이고, 사람이 없으리라 예상했다. 나고야 역을 나와 동쪽으로 조금 걸어가야 했다. 지하 아케이드를 통해 갈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러면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아 지상으로 걸어가기로 한다.
어제는 서쪽 출구 쪽만 살펴봤는데 동쪽 출구로 나오니 번잡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이 정도의 번화가는 찾기 쉽지 않다. 금요일 밤의 강남역과 사람 수는 비슷하지만, 그 규모는 이쪽이 더 크다. 물론 나고야보다는 도쿄가 훨씬 더 번잡하다. 신주쿠 역의 횡단보도와 지하철 개찰구 규모를 처음 봤을 때 놀란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신도림 역을 4개 쯤 이어 붙인 모습 같았다. 일본의 인구는 2010년 즈음 부터 감소 중이라고 한다. 한국도 4년 전부터는 감소 중이니 딱 10년 차이를 두고 인구 감소가 시작되었다. 인구 수와 번화한 모습으로만 따지자면 절대 이 모습을 따라잡을 수 없겠다. 아무튼 아침에는 이세 시의 청정 자연에서 깨끗한 물에 손을 씻다가 갑자기 나고야에서 주말을 즐기러 나온 수 많은 젊은이들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나고야에서도 이치란 라멘 그릇을 내 앞에 놓기까지 30분이 걸렸다. 라멘을 후루룩 마시고, 사전에 주문을 받고 주문도 극히 빨리 서빙되는, 식사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하는 시스템임에도 30분이나 걸렸다. 줄의 앞쪽에는 한국에서 온 젊은 청년들이 한국 여성과 일본 여성을 비교하며 떠들고 있었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곳이 아닌 나고야나 소도시들은 항공료도 비교적 싸서 친구들과 여행오기는 좋을 것 같다. 도미토리와 이치란으로 점철된 여행이라면 젊은이들도 경제적 부담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도 똑같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맛을 가진 이치란 라멘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나고야 성으로 간다. 아이폰에 파스모 카드를 심고 이걸 이용하니 전국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남은 돈은 삿뽀로에서 귀국하기 전에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를 몇 개 사서 해결 할 수 있었다. 나고야 성 근처에도 식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 사람들은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나 했더니 오늘이 주말인 것 같았다. 한가로이 나무 밑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부러워보인다. 커피를 마시는 여유보다는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이 부러워보였다. 오랜 기간 여행을 하니 이제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 쯤 입장한 나고야 성은 오사카 성과 마찬가지로 근대에 와서 새롭게 만든 콘크리트 건축물로 천수는 보수 공사 중이라 입장할 수 없었다. 대신 다이묘가 거주하고 외부의 방문 인사를 접견하는 기능으로 쓰인 혼마루 어전은 대대적으로 새롭게 건축하여 관람할 수 있었다. 지속적으로 복원을 하며 마침 최근에 작업이 완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 성을 가면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같은 말을 쓰는데, 중심부인 천수부터 가장 가까운 내부, 한겹 성 밖으로 나간 곳, 거기서 한겹 더 나간 곳 등을 단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어전이니 만큼 권력자를 접견하려면 복잡한 복도를 겹겹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바닥의 높낮이, 그리고 섬뜩하게 묘사된 맹수 그림들은 권력의 상하 관계를 현실로 소환한다. 돌아나오는 길에 보이는 부엌 등도 흥미로웠다. 아마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어전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명나라 사신을 접견 했을 것이며, 여기서 화친은 없으며 정유재란을 일으켜야겠다 결심했을 것이다. 그 결심 때문에 한국인은 최대 백만명이 죽었다. 또 한국에서 ‘에비’라는 말이 어린아이들을 겁주는 표현으로 만들어졌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막 문을 닫고 있었다. 입구에서 안내해주던 아저씨가 5시까지 마지막 입장이라고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빨리 뛰어오라고 소리친다. 5시가 살짝 넘었는데 그래도 이런 융통성은 있나보다.
성을 둘러 나오다보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동상과 돌을 볼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로 나고야 성 건축시에도 그 수완을 발휘했다고 하는데 이 성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울산왜성, 며칠 전에 둘러보았던 구마모토 성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사진의 돌은 이 나고야 성 건축에 쓰인 돌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하고, 어디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돌을 다듬어 이용했다고 한다. 그의 동상도 실제 그가 건축을 감독했다고 여겨지는 돌 위에 세워 놓았다.
다시 나고야 역으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간다. 지하철 나고야 성역에 도착해서 건너편을 살펴보니 일본과 서양 양식이 섞인 오래된, 커다란 건물이 눈에 띈다. 구글 맵이 이 건물은 시청이라고 말해주었다. 조금 더 남쪽으로는 나고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추부 타워도 있었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이세신궁을 보느라 오늘 하루를 다 쓴 탓에 사실 가보고 싶은 곳을 못 둘러봤다. 나고야 과학관이나 아츠타 신궁도 가보고 싶었지만 언젠가 나고야에 올 기회가 있다면 쉽게 둘러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뤄두었다.
나고야역으로 서둘러 돌아온 이유는 특급열차 시나노를 타고 마츠모토시로 가기 위해서이다. 오늘 하루 종일 역사 코인라커에 맡겨 놓았던 짐을 찾았다. 열차에서는 특별히 가장 앞 자리를 예약하려고 했으나 인기가 있는지 누군가 한 자리를 예매했다고 했다. 텅텅 빈 1등석 칸의 가장 앞 두 자리에 나란히 앉아가는 것은 민망한 일이라 그냥 앞에서 두 번째 자리를 달라고 했다. 시나노 특급열차는 나고야와 나가노를 잇는 열차로 특별히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어 유명하다. 가장 앞 자리에 앉으면 조종석 앞까지 유리로 훤하게 들여다보인다. 계곡와 협곡을 따라 산속을 달리는데, 특히 우측에는 일본 알프스라고 불리는 3000m 이상 급 고산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날씨 좋은 낮이면 경치를 즐길 수 있겠으나 나는 나고야 역을 떠나자 금새 날이 어둑해져서 약간의 노을 풍경 밖에는 살펴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도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준령고봉들임은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이 일본 알프스를 찾는 많은 여행객, 여행 상품이 있다.
열차에 앉아있는 사이 파란색과 붉은색이 서로 다투던 하늘은 어느 사이에 깜깜해졌다. 깊은 계곡 속, 빛이 없는 공간을 홀로 달리는 열차는 마치 은하철도999를 연상케 했다. 열차 기관사와 그 보조, 그리고 나보다 빨리 첫 번째 줄을 선점한 ‘중국인’이 아닐까 생각되는 관광객 두 명, 그리고 나. 모두 네 명이 깜깜한 우주 공간을 날아간다. 두 시간 정도를 달려간 열차는 마츠모토 역에 도착했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두 시간 전의 나고야와 완전히 다른 공기의 질과 온도가 느껴졌다. 마츠모토 시는 고봉사이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도시다. 이번 여행 중 처음으로 바다를 접하지 않은 도시이다. 또 이번 여행 전에는 이름도 알지 못했던 곳이다.
오늘 하루는 신칸센을 타지 않고도 이세시를 왕복하고 나고야를 거쳐 마츠모토까지 달려왔다. 어서 숙소도 들어가서 쉬고 싶은 마음에 식사는 역 앞에 바로 보이는 맥도널드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의외로 맥도널드에는 서양인 관광객들이 눈에 보인다. 여기에는 무엇을 보러 왔을까? 이 고장이 최고의 와사비 산지로 유명하니 그걸 맛보러 오진 않았을 텐데. 곧 연인이 될 것 같은 고등학생 커플들 사이에서 빅맥 라지 세트를 먹었다. 다들 들키지 않으려는 은밀한 연애를 하는 듯 조용조용 소근거린다. 나는 주말 저녁 이 동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행색의 사람 같았다. 후쿠오카, 나가사키, 히로시마, 나고야를 거쳐 마츠모토까지 나는 점점 한국인이 희박한 곳으로 들어간다.
숙소는 호텔 M 마츠모토라는 곳으로 정했다. 들어가는 입구를 찾는데 조금 오래 걸렸지만 역에서 가깝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만족한 숙소였다. 캡슐 호텔에 몇 박을 해보니 이 캡슐이라는 것에도 급이 보였다. 이를 테면, 올라가는 사다리가 튼튼하고 밟기 좋게 되어 있는지, 너무 위아래 넓은 간격으로 되어 있지 않은지, 손잡이도 양쪽에 붙어 있는지, 캡슐 내부는 넉넉한 공간인지, 원통형이라 실제 공간이 좁은 경우가 있지 않은지, 직육면체 형태로 파여 있어 충분히 넓게 쓸 수 있는지, 내부의 조명, 콘센트는 넉넉하거나 누워서 컨트롤 할 수 있는지, 심지어 어떤 곳은 이어폰을 꼽아 라디오도 들을 수 있다. 입구를 가리는 커튼은 두꺼운지, 빈틈 없이 들어오는 빛을 가릴 수 있는지, 안쪽에서 커튼을 걸어 잠글 수 있는 고리 같은 것은 있는지, 만약 맞은 편에도 침대가 있다면 비스듬하게 교차로 배치하여 내부가 너무 훤히 보이지 않도록 했는지 등등 신경 쓰면 숙박하는 사람에게 조그만 편의를 줄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이 보였다. 숙박업을 하려면 일단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자봐야 할 것 같다.
보통 젊은이들이나 해외여행객이 많이 이용하는 도미토리형 숙박들은 이러한 편의 사항들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짜피 한번 오고, 하루 이틀 잘 사람들인데 뭐. 그냥 나무로 된 삐걱거리는 가장 싼 침대, 자고 일어나면 허리가 뻐근해지는 매트리스로 숙박업을 시작한다. 반면 일본 내 출장객이나 단기 여행객들이 숙박하는 내국인 대상 업소, 혹은 체인 캡슐 호텔들은 깜짝 놀랄 만큼 섬세하게 이런 것들을 배려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늘 하던 루틴대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 세탁을 하고, 건조기를 돌리고, 내일의 일정과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 정확히는 캡슐 안으로 쏙 누웠다. 로비에는 엄청난 수의 만화책이 있어서 자유롭게 볼 수 있는데 슬램덩크니 드래곤볼이니 하는 유명 만화들이 있었다. 특이하게 정수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얼음물을 상시 비치해 따라 마실 수 있었다.
참고로 마츠모토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특히 점을 찍어 놓은 호박으로 유명한 쿠사마 야요이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우리 동네 과천 현대 미술관 앞마당에 이 할머니의 호박이 놓여있는데, 내가 재미있어하는 가느다란 인연을 찾는 재미를 느꼈다. 나중에 아는 척 할 거리가 하나 늘었다. 근처에 쿠사마 야요이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이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방문할 시간은 없었다. 아침 일찍 나와 마츠모토 성을 보기로 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 덧 여행도 절반을 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