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풍기인지 선풍기일지 모를 소리에 잠을 설쳤다. 어느 쪽 기능도 잘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미토리 이층 침대 중 위쪽에 누웠더니 천장에 붙어 있는 팬 소리가 시끄러웠다. 헐거운 커버 때문에 나는 불규칙 소음이 여간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이 아니다. 7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서 이른 열차를 타기로 했다. 시간도 없거니와 이 숙소에서도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모두들 잠들어 있는 깜깜한 시간에 살금살금 샤워실로 간다. 모든 게스트하우스 샤워실의 구조가 어찌나 똑같은지 놀랍다. 짧은 여행의 중간 쯤 지났을 뿐인데 샤워 루틴이 생겼다.
오늘 아침의 목적지는 이츠쿠시마 신사이다. 한국에서 “이츠쿠시마 신사”에 다녀왔다고 하면 아마 대부분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바다 위에 도리이가 떠 있는 사진을 보여주면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라고 답할 것이다. 아직 실제 사진을 보여준 적은 없다. 일본에서는 유명한 여행지지만 한국 사람들은 많이 방문하지 않는 것 같다.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인은 대부분 후쿠오카, 도쿄, 오사카 그리고 삿뽀로에 몰려있다. 일본 관광청이 하는 일은 외국인 관광객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분산 시키는 것이다.
이츠쿠시마 신사까지는 택시로 가는 사람,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 심지어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2023년 방문한 G7 정상들이 배를 타고 이동했다. JR패스를 이용하는 관광객에게는 히로시마 역에서 미야지마구치까지 가는 JR일반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편하고 저렴하다. 저렴한 것이 아니라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차도 무료로 이용할 뿐더러 미야지마 섬을 오가는 페리선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워낙 관광객이 많아 여기까지 종점인 사철도 있다. 또한 JR페리와 다른 기업이 운영하는 페리 왕복을 운영하고 있다. JR패스 이용자가 괜히 돈을 내고 이쪽을 이용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부지런한 샤워를 하고, 짐을 싸들고는 숙소를 나선다. 이른 출근시간이라 본격적인 러시아워는 아니다. 똘똘한 학생과 성실한 샐러리맨만 보였다. 배낭을 들쳐매고 갈 수는 없으니 코인라커를 찾아 짐을 맡긴다. 저렴하면 200엔, 비싸면 500엔 정도를 받는다. 구글 리뷰에는 더 저렴한 가격으로 나왔으나, 최근에 가격이 많이 올랐나보다. 인플레이션이 비켜갈 틈새는 없다. 나고야, 히로시마 등 커다란 역사 내에서는 대부분 500엔이었다. 짐을 맡기면 바코드가 출력된 종이 하나를 받을 수 있다. 찾을 때 이 종이를 스캐너에 스캔하면 문이 자동으로 열려서 편리하다. 다만, 이 종이를 잃어버릴 경우 전화를 해야 한다. 편리와 불편도 동전의 양면이다.
학생들의 이른 등교길과 섞여서 기차를 타고 30분 가량을 달려간다. 앉아있을 순 없어 서서 풍경을 바라본다. 몇 개의 커다란 강을 건너간다. 일본의 다른 대도시와 닮았다. 히로시마도 바다를 낀 만에 위치해 있고 도시 가운데를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다. 어제 원폭 기념관에서 본 모두가 불타 없어져버린 너른 풍경과 대비된다. 모든 것이 그 이후 새로 세워졌으리라. 서서 다리가 슬슬 아파질 무렵 다다른 미야지마구치 기차역은 소박한 기차역이다. 서울의 1호선을 타고 신도림을 지나 한참 가면 나오는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할 역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이름 모를 역과 마찬가지로 선로를 넘어가는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역사 밖으로 나왔다.
대부분 관광객들이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 식사 할 시간이 없으므로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하나씩 샀다. 이를 손에 하나씩 들고는 페리를 타러 걸어가는 길에 먹었다. 생각해보니 편의점 빵으로 떼우는 식사는 20대 이후 해본적이 거의 없다. 젊었을 때 신촌이나 이대역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났다. 20대에는 고등학교를 다녔던 과천을 벗어나 그런 곳을 돌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신촌역 상점들의 불이 모두 꺼졌고 나는 우유를 그 때의 절반만 마신다. 기차에서 내린 한무리의 사람들이 내가 편의점에서 빵을 사는 동안 모두 선착장으로 몰려가서 거리는 한산했다. 마치 북미에서 온 버팔로 떼가 쓸고 간 것 같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어 아침부터 조금 덥게 느껴졌다.
페리는 오래되어 보이지만 커다란 배였다. 히로시마 만 안쪽에서 험한 파도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 퇴역이 가까워온 노령의 선박을 투입한 것이 아닐까? 노령이지만 약 30분 간격으로 부지런히 섬과 선착장을 오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덕분에 줄서 기다리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 배 안에도 앉아서 구경할 자리가 넉넉했는데 아침 10시가 넘어 돌아오는 시간에 살펴보니 관광객이 두 배는 늘어나 있었다. 배를 타면 짧은 거리라 금방 섬에 닿는다. 섬 가까이 가면 그 유명한 물 위에 떠 있는 도오리 (썰물에는 땅위에 서있는) 가 보이는데, 사람들이 온통 그 쪽에 몰려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배가 기우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이츠쿠시마에는 다양한 볼거리나 관광명소가 있는 것 같다. 케이블카를 타고 섬 정상에 올라가 히로시마 만을 둘러볼 수도 있고, 산을 넘는 트래킹 코스를 지나 섬 건너편의 신사들을 방문할 수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수 백 km를 이동해야 하므로 이츠쿠시마 신사와 그 주위만 둘러보기로 했다. 이 곳은 일본의 3대 절경이라는 말도 있고, 신성한 산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 유명세에 비해서 딱히 느껴지는 감탄은 없었다. 3대 절경이라는 사실도 방금 기차를 타고 오면서 검색하며 알았고, 입구의 커다란 돌에 방금 인터넷으로 본 ‘일본삼경 미야지마’ 글자가 있었다. 나머지 2경에도 똑같은 돌이 있는지 궁금했다.
배에서 내려 해안가를 따라 조금 걸어가다보면 유명한 도리이가 다시 보이고, 본당 건물이 나타난다. 일본 신사 특유의 강렬한 주홍빛으로 칠해져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본당 건물 전체가 물 위에 떠 있는 밀물 시간이었다. 관람객은 굽이굽이 건물 내 통로를 따라 신사 내부를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건물 내 감흥을 느낄 만한 것 보다는 본당 앞 쪽에서 바라보는 도리이와 바다의 풍경이 아름다웠다. 어느 중년의 일본인 부부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해서 한 장을 찍어드렸는데, 나 보고 찍어줄까? 물어보길래 괜찮다고 사양했다. 혼자서 포즈를 잡고 누군가에게 찍히는 것이 어색했다. 옆으로 비켜나 조용히 혼자 폰을 들고 셀카를 찍었다.
여기도 곳곳에 사슴이 돌아다닌다. 나라 공원의 사슴과 다르게 센베를 주식으로 하는 것 같진 않고 관광객에게 달려들지도 않는다. 사람과 서로에 의지하지 않고 평화로운 공존의 상태로 각자 살아가는 것 같다. 번잡한 신사보다 주위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즐거웠다. 잠시 앉아서 바다를 살펴보기도 하고, 가게를 열 준비를 하는 주인들의 바쁜 이야기를 들었다. 여행에서는 이렇게 시간의 나만의 흐름을 가지는 시간이 좋다. 세상의 시간은 어디서나 그대로 이지만 관찰자의 시선이라면 나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도록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미야지마에서 1시간 반 정도를 보낸 후 다시 히로시마 역으로 돌아왔다. 히로시마 역에서는 에키벤을 샀다. 에키벤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역마다 고유의 에키벤을 만들어 판다거나, 이 것을 먹기 위해 그 지역으로 여행을 한다거나. 한가지 말해주지 않는 것이 있다.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국민성이 만든 기차 안에서 먹도록 만든 도시락이라 모두 차가운 음식 뿐이다. 냄새 없이, 오로지 식감과 혀의 맛으로 먹을 수 밖에 없다. 즉 도시락이 맛 있는지 맛 없는지는 취향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덜 맛있게 먹는 느낌이다. 아무도 데워달라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젓가락을 주지 않아서 물어보니 젓가락은 도시락 안에 들어있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신칸센을 타고 가는 가장 장거리 구간이다. 히로시마에서 나고야까지. 500km가 넘는 거리지만 두 시간 조금 넘으면 닿을 수 있다. 중간에 오카야마, 히메지, 고베, 오사카, 교토 구간을 모두 지나쳐간다. 히메지, 고베, 오사카, 교토는 모두 수 차례 방문했던 곳이다. 오카야마의 고라쿠엔이나 오츠시의 비와호 등은 꼭 방문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비와호 주위를 도는 렌터카 여행 등은 꼭 해보고 싶다. JR패스로는 직행을 탈 수 없어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한다. 교토역을 지날 때는 오늘 쪽으로 동사의 오층탑이 보였다. 한달 전에 가족과 둘러보던 그 곳이다. 문득 같이 하는 여행이 그리워졌다.
나고야 역에 도착하니 두 시가 넘은 시간이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두 정거장 가량 이동하여 사코역에 내렸다. 오늘 이렇게 바삐 움직인 이유가 있다. 오후의 목적지는 도요타 산업기술 기념관이다. 이번 여행 유일의 ‘신사, 정원, 공원, 박물관, 성’이 아닌 곳이다. 나고야는 공업도시로 특히 도요타 자동차의 본사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있다. 엄밀히 말하면 도요타 자동차의 본사는 근처에 있는 도요차 시에 위치해 있으나 도요타를 창업한 곳은 나고야의 이 산업기술 기념관 위치라고 한다. 도요타는 일본 기업으로는 가장 크고, 세계 자동차 기업 중에서는 테슬라 다음의 시가 총액을 자랑한다. 판매 대수 기준으로는 가장 많은 자동차를 판매하는 회사이다.
관람은 유료이지만 무료 코인라커를 쓸 수 있어 편리했다. (이 정보를 미리 알아 나고야 역에 짐을 맡기지 않고 들고 왔다) 관람은 5시까지 가능했는데, 조금이라도 여유있게 둘러보려면 최소한 두 세 시간은 필요하니 꼭 시간 여유를 두고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 섬유 기계관과 자동차관으로 나뉘어 있는데, 섬유 기계관에서 시간을 너무 쓰면 뒤 쪽의 자동차관을 관람할 시간이 없으니 적절히 시간을 배분하는 것이 좋겠다. 아이와 같이온 부모, 자동차에 관심이 있는 커플,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한국 가족 외에는 외국인은 거의 못 본 것 같다.
입장하면 압도적인 크기의 원형 방직기계가 나타난다. 도요타는 원래 자동 방직기계를 만드는 회사로 출발했다. 베틀로 천을 짜던 시기에서 벗어나 자동화된 기계를 이용하여 생산량이 크게 늘었는데 이 것을 원형으로 구성해서 같은 공간에서 훨씬 더 집약적인 생산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러한 몇 가지 핵심 특허를 개발하고 이 권리를 영국에 팔았는데 이 것이 바로 자동차 제조에 도전하게 된 자본이 되었다. 성공한 기업 어디에나 있는 창업주의 몇 가지 신화적 고난 극복의 이야기들을 홍보하고 있다.
자동차를 처음 만들 때는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적극 활용한 것 같다. 쉐보레의 자동차를 몇 대 수입해 모든 부품을 분해하여 조립 과정을 기록하고, 그 중에 핵심 부품을 독자 개발하여 그 부품을 대신 끼워 넣어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한다. 방직기를 만들 때 보유했던 금속 단조, 주조 기술에 자신이 있었는지 원래 모델보다 더 내구성이 강한 부품을 만들어 더 높은 엔진 출력에도 버티는 실험을 반복했다. 자동차 개발의 특명을 받은 그룹의 사진을 보니 지금 회사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초창기 시절이 생각났다. 새로운 일은 모방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방직기 등은 크게 관심이 없어 눈도장 찍듯 둘러보고 자동차 전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만 수입차 딜러 쇼룸처럼 자유롭게 탑승해보거나 조작해보는 것은 어렵고 겉에서 둘러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전기차나 그들이 자랑하는 하이브리드 차량의 엔진이나 설계 등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현대모터스튜디오 고양에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도요타 쪽은 진짜 쓰였으나 기술의 발달로 퇴역한 기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실제 프레스나, 도색 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현대 쪽은 자동차 생산의 과정을 더 Conceptual 하게 보여주는 느낌이다. 어린이는 현대 쪽을 좋아할 것이고, 어른은 도요타 쪽을 더 좋아할 것 같다. 짧은 시간이지만 자동차 관을 열심히 둘러봤다. 전기차나 렉서스 등 고급차의 초기 차량들도 관심이 있었다. 마감 방송이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검색해보니 시시마루라는 라멘집이 괜찮아 보였다. 마침 걸어오는 길이었다. 도착했더니 가게 문앞에는 줄잡아 20명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보통 줄을 서서 먹지 않는다. 다시 구글맵을 열고, 길 건너편의 마이카리라는 카레 집을 방문했다. 그래, 일본와서 카레 한번 먹어야지. 그런데 메뉴를 키오스크에서 터치할 수 없게 막아 놓았다. 카레는 품절이란다. 같은 장소의 마츠야에서 규동을 주문했다. 몸의 많은 부분의 규동화 되어가는 느낌이다.
숙소로는 나고야역 근처의 와사비호스텔이라는 곳을 예약했다. 역 주위라 환경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실내는 어제의 숙소보다는 훨씬 낫다. 이번 여행은 아무 계획 없이 돌아다니기에 내일 어디를 방문할지 정하는 것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기회가 아니면 절대로 오지 않을 곳, 한국 사람들이라면 거의 가지 않을 곳, 네이버 검색에 절대 나오지 않는 곳이 목표다. 마음에 드는 그러한 곳을 한 곳 정하고 내일 아침의 이른 기상을 기약하며 오늘도 잠든다. 오늘도 4만보를 넘게 걸어 다녔다. 오늘 저녁 먹은 규동으로 체력유지가 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