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좋아하는 어몽어스 놀이가 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어몽어스 게임을 보고 만든 듯 하다. 아들은 어몽어스 스티커를 잘 보이는 곳 군데군데 붙인다. 유치원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날에는 어몽어스 마스크를 쓰고 나간다. 집에서 무기력하게 있는 나에게 어몽어스 놀이를 하자고 간청한다. 제발 아빠. 응?
규칙은 이렇다. 우주선을 조종하는 승무원(크루) 중에 임포스터라 불리는 사기꾼이 있다. 그 악당은 몰래 다른 평범하고 선량한 승무원을 해치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숨어서 엔진을 고장내거나 하는 등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들키지 않고 미션을 완수하면 승리, 임포스터라는 정체를 들키면 패배로 놀이는 끝나게 된다.
놀이를 할 때면 아들은 엄마 아빠에게 귓속말로 “엄마는 임포스터야”, “아빠는 크루야” (배역은 늘 정해져있다) 알려주고 자기 역할은 비밀로 한다. (임포스터다) 거실은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긴장감 넘치지만 겉으로는 평화로운 우주선이 되고, 잠시 후 나는 임포스터 아들에게 최후를 맞는 선량한 아빠로 끝나는 그런 놀이이다. 나는 아들과 엄마가 임포스터인지 의심만 하다가 끝끝내 밝히지 못하고 배신을 당한다.
내가 사는 세상에는 임포스터가 있나? 놀이할 때는 눈에 보이는 임포스터 아들을 모르는 척 한다. 반면 우주선 밖 진짜 세상에서는 임포스터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자부심을 가진 조그마한 신념 들이다. 예를 들면, “내가 상처 받는 것은 오해 때문이다. 오해는 치열하게 100%의 소통을 하면 없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악해보이는 것은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배경과 상황 때문이다.” 와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생각은 나를 편하게 해준다. 내가 더 좋은 사람으로 세상을 살 수 있게 해준다. 내가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해준다.
만약 어몽어스 놀이를 하는 것처럼 ‘우리 중(Among us)에 적이 있다’라고 생각해보자.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반드시 불안과 걱정, 경계와 의심이 싹튼다. 늘 하나의 수를 더 생각해야 한다. 임포스터와 같은 위선자를 만날 때, 상대가 말과 다르게 행동할 경우의 표정을 준비해야 한다. 하나의 변수이지만 방정식은 훨씬 더 풀기 어려워진다. 게다가 이러한 나의 고려가 뜻하지 않은 상처를 타인에게 주게 될 것이다. 머뭇거리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크루들은 임포스터가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럴 바에 비록 내가 손해보는 일이 있고 배신당하는 일이 있어도, 세상은 선의로 가득한 사람들이 오해와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래, 오해가 바로 임포스터다!) 그게 현실과 다르더라도 말이다. 의심하는 생각보다는 바보같이 순박한 행위가, 복잡한 방정식 보다는 다른 사람의 위선이라는 변수를 제거한 간단한 수식이, 적어도 앞으로는 스스로 늘 임포스터 역할만을 하는 아들이 살아갈 세상을 훨씬 더 좋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가끔은 임포스터라고 거의 확신하게 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최선의 이해의 노력을 해도, 순수한 악당일지 모르겠다는 상대방을 마주치게 된다. 이 때는 뜨거운 냄비에 닿은 손가락 마냥 화들짝 놀라 손을 떼는, 관계의 단절 밖에는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배신을 당한 결과적 손해보다 신념을 무너뜨리는 근거가 더 무섭다. 안타깝지만 이러한 경험이 쌓일 수록 임포스터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주위를 돌고, 자리를 비우고, 대화보다는 가식의 웃음으로 말한다.
우주선을 타고 가는 일생이라는 항해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 놀이의 결말은 (이론상으로는)두 가지다. 임포스터를 모두 찾아내어 평화로운 항해를 이어가거나, 임포스터에게 배신과 죽임을 당하거나. 현실의 결말은 조금 더 단순하다. 반드시 죽을 것이고, 반드시 임포스터를 만날 것이다. 다만 임포스터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고, 반대로 평화로운 내면으로의 항해를 목표로 할 수도 있다. 시나리오는 마찬가지로 두 가지고 다행히 이쪽은 미리 정해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