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부쩍 아빠,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가 요즘 즐겨보는 동화책의 엄마, 아빠에서 떨어져 혼자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내용이 원인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 계기야 어떻든 아이는 아빠, 엄마와 헤어질 수 있다는 것, 또 그 헤어짐이 영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아침마다 출근하는 아빠를 보면서 울고, ‘아빠 엄마랑 오래오래 같이 살자’는 60살 먹은 할아버지가 할법한 말을 자주 한다. 그 아이는 현재를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하진 않겠지만, 이 따뜻함과 안온함의 시간이 영원히 계속 되기를 아주 간절히 바라는 것 같다.
사실 이것은 어른인 나에게도 아주 오래전부터 묻어둔 공포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이후에 나의 존재는 가족과의 관계와 동일한 것이 되어 버렸다. 오직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나는 약 40년을 거슬러 올라가 태어날때의 벌거숭이로 돌아가거나, 약 40년을 미래로 가 모든 것을 잃기 직전에나 상상이 가능하다. 이미 나는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어쩌면 혼자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는 것도 괴로운 것일 수도 있다.
가족과의 관계가 나라는 존재가 되어버린 이후, 가족을 잃는다는 상상, 혹은 이 우주에서 이 관계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현실은 나의 죽음을 넘는 두려움이 되었다. 볼을 부비고, 살을 맞대고, 같이 웃고, 사진을 찍고, 즐거운 대화를 하고, 머리카락의 냄새를 맡는 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위로 표현한다. 하지만 반대로 그 ‘관계’를 잃는다는 엄청난 공포를 현재, 이 순간 이나마 잠시 잊기 위한 간절한 행위이기도 하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런 것처럼 무언가를 가졌을 때의 엄청난 기쁨은 그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공포이기도 하다. 나의 삶이 생겼을 때부터, 아이가 생겼을 때부터 이러한 기쁨과 공포의 동전이 주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또 이 동전은 삶의 매 순간마다 뒤집히기를 반복한다. 어떤 면을 보고 있을때의 공포는 때때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지만, 이는 삶이라는 것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받아들이게 된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의 선택지는 완전한 공백 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