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달리고 오르내리던 아들은 기운이 다 빠진듯 숨소리도 조용히 잠들었다. 고른 날숨 소리가 방 밖으로 들려오는 듯 하지만 나지막히 잘 들리지 않는다. 꿈 속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놀러 가거나 괴물에 쫓겨 달리고 있을지 몰라도 현실은 고요한 또 정적인 모습 자체다.

아내는 거실에 누워서 TV소리에 묻혀있다. 주말의 절반을 일로 보내고, 나머지의 절반은 아이와 그리고 나머지는 기어코 TV와 보내겠다고 한다. 나와 나누어 먹던 과자가 하나씩 줄어든다. 언제 잠들지 모르겠지만 주말 중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 지금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누워서 거쉰을 듣다가 지금 시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브람스로 바꿨다. 내일은 늦잠을 자도 된다. 굳이 지금 잠들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누워있는 내 모습이 나름대로의 사치를 누리는 듯 하다. 평상 시 같으면 책을 읽을 시간이지만 주위의 모든 도서관이 문을 닫은 까닭에 읽고 싶은 책이 7~8권은 밀려있다. 쉽게 다시 열 것 같지 않다. 이제 사서 봐야하나?

우리 세 명은 아픈 사람도 없고 배가 고프지도 않으며 내일 일찍 일어날 일도 없다. 탐험에 나서야 할일도 없으며 치열해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이다. 그래 이정도면 훌륭하고 잘 지내왔으며 자랑스럽다. 각자가 지금 덮고 있는 이불의 따스함 정도만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지적 통찰력

단순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현장을 무마하거나 와해 시키는 수준에서 대응한다. 더 능력있는 사람들은 다양한 이해 관계와 욕구 속에서 왜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는지 이해하려 한다. 또 빠르게 상황을 읽고 최선의 선택을 한발 앞서 행한다. ‘다이나믹’을 순식간에 파악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러한 능력이 부족하다. 과거, 미래, 타인에는 관심이 없고 내 책상 위에 올라온 일에 집중한다. 따라서 자동차 정비공처럼 충분히 공부를한 자체가 왜 돌아가지 않는지는 쉽게 알 수 있지만 자동차 세일즈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또 다양한 상황에 맞는 임기응변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이건 단순히 그 환경에 오래 있거나, 책을 열심히 보고 공부한다고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이해 당사자, 즉 플레이어가 되어 치열하게 경쟁해야 가능한 일이다. 경쟁이라는 것은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가 빼앗아 가는 것을 뜻한다. 빼앗겨 보면 무엇이 부족했는지 알게 된다.

더 많은 사람과 연결 될 수록 순간적인 통찰력, 경쟁은 필연적일 것이다. 움추린채 껍질을 단단하게 덧바르거나, 무수히 많은 경쟁에 참여해 지지 않게 하거나 둘 중의 하나는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