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ist] The word for “condescending old person” in Korean (“잘난척 하는 늙은이”를 뜻하는 한국어)

한국 젊은이들의 계급에 대한 저항에 “꼰대”가 시사하는 것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당신만큼 일에 헌신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가? 패션 선택이나 연애에 대해서 젊은 직원들에게 요청 받지 않은 충고를 하는가? 사무실의 주니어들이 당신의 커피를 들고 오지 않을 때 짜증이 나는가? 주의해라: 당신은 꼰대 영역에 들어왔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당신의 부풀려진 자존심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질 것을 추천한다. 당신은 그들의 존경을 얻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나이 들었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다.

꼰대는 출처가 불분명한 신조어이다. – 아마 영단어 “Condescend(거들먹거리다)”의 차용일 것이다. 이는 젊은이들에게 묻지마 복종을 기대하는 나이든 사람(보통은 남자)를 뜻한다. 꼰대는 트집잡는 것은 빠르지만 자기의 실수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보복한다. 한국은 이 단어를 자아도취에 빠진 상사부터 고압적인 삼촌, 부폐한 정치가들에게 까지 이용한다. 꼰대 테스트와 어떻게 하면 꼰대를 탈출할 수 있을지 팁을 제공하는 웹 사이트 들이 있다. 온전히 꼰대에 관해 토론하는 토크 쇼가 최근 텔레비전으로 방영 되기도 했다.

한국은 근무기간, 성별, 나이에 기반한 숨막히는 직장 위계로 악명이 높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어린 동료나 친척이 그들을 칭할 때 틀린 호칭을 쓰면 격분한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상사가 요청한 일이 끝난 후 술자리나 주말의 하이킹을 거절하기 어렵다. 구정이나 추석때, 여성들은 남자들의 도움 없이 마지못해 시댁에서의 요리나 청소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저는 어머니를 도와야 하지만, 남자 형제는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24세 학생 박지수는 말한다. “모두들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꼰대를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문화는 변화의 조짐이다. 위계 질서에 대놓고 저항하는 경우는 아직 드물고 못마땅하게 비춰진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박지수 양은 나이 많은 친척들은 아니더라도 형제에게는 저항한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남자의 말을 따르라는 압력을 예전보다는 덜 느낀다고 한다. 어머니들은 남편에게 밖에서 아기를 안고 있거나 (자주는 아니지만)집안일은 도우라고 설득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최근 도입된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에 따라 더 자극 받아, 퇴근 후 술에 ‘아니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욕구에 더 신경 쓰고 있으며 사회적 인정을 얻는데는 덜 그렇다고 서울에 위치한 연세대학교의 인류학자 조한혜정은 말한다.

교육이 이러한 변화를 부분적이나마 설명한다. 젊은이들은 나이든 사람보다 이러한 경향을 더 보인다. 이것이 꼰대에 대적할 위대한 힘을 준다고 미국 Vassar 대학의 문승숙은 말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동년배들처럼, 한국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로 불안을 느낀다. 연세대학교의 사회학자 이도훈은 지난 20년을 살아온 이들은 1997-19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불안정성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좋은 교육도 그들의 안전과 지위를 보장하지 못한다는데 공포를 느낀다. 이는 그들을 사회 질서에 더욱더 반하게 만들고 일부는 이것이(사회 질서) 그들에게 불리하게 동작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진화하는 정치 문화도 마찬가지로 충격을 주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1980년대 후반 이래, 인간의 권리는 동일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보편권에 대한 믿음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게 만든다. 5년 전 한 여객선의 침몰로 인한 304명의 죽음도 묻지마 복종의 위험에 대해서 자기 분석을 하게 했다. 많은 희생자들은 고등학교 학생들로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따랐다.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이미 배를 버렸다.) 이 재난에 대한 정부의 서투른 대응이 대규모 시위를 촉발 시켰고 이는 박근혜 정부의 탄핵과 부폐 혐의에 대한 유죄판결로 이어졌다.

권위에 대한 오래된 관습은 하루 밤 사이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이들은 더욱 더 계급에 저항하지만, 그들이 나이든 후에는 어떨까? 현재의 건방진 젊은이들의 일부는 그들이 꿈꾸는 성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나이든 사람들이 자동으로 누렸던 존중과 같은 종류의 것을 열망할지 모른다. 오늘날의 꼰대 비판자들이 그 자체로 꼰대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의 젊은이들이 그렇게 내버려둘지는 의문이다.

공부를 하는 이유

내가 하는 순간 순간의 선택,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이 선택이 현실 사회를 내가 바라는 세상 쪽으로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란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내가 하는 사회적인 고민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물론 어떤 선택에서는 사회적인 고민 없이 지극히 현실과 타협하는 개인적인 고민만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의 행위와 나의 이상이 서로 정렬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식자(識者)로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사회는 너무 복잡한 인과 관계로 얽혀 있어 그 선택의 이면에 존재한 다이나믹을 알기 어렵다. 나의 행위는 어떤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타인의 어떤 행위를 낳고, 그 사람은 다시 어떤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연결 속의 영향력은 점차 증폭되거나 점차 감쇄되어 내가 작은 행동을 할 때 미쳐 의식하지 못했던 나비 효과를 가져온다.

내가 지불한 돈이 누구에게 어떻게 흘러들어가서 이용되는지 알아야 하고, 내가 지킨 법규나 도덕룰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영향을 행사 하는지 알아야 하고, 나에게 작은 권력이라도 있다면 이를 이용하는 것이 그 영향력 하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 시킬지 알아야 한다. 사회는 무수히 많은 행동과 반응, 증폭과 감쇄, 전파와 소멸을 한꺼번에 넣고 뒤섞은 창고와 같다.

가끔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나의 행위와 이상이 정렬 하는지 확인하려면 내 선택의 이면을 하나 하나 올바른 방향으로 따라가야 한다. 이게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이다. “내 선택이 세상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부끄러운 일을 할때, 혹은 부당한 일을 할 때 이러한 인과 관계를 가능하면 감추려하고 약하게 만든다. 또는 정반대의 인과 관계라는 인식을 부당하게 심으려 한다. 알지 않으면, 깨어있지 않으면 혼란 속에서 나의 행위가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의 세상을 오게 만든다.

진리는 나의 빛. 거창하게 진리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감춰진, 은폐된 다이나믹을 아는 것이 현실에서의 소소한 선택에 빛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