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좋은 이유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다시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오랫동안 개정판이 끊겨 표지는 반쪽 밖에 남아 있지 않고, 모서리는 둥글둥글 냄새가 났다. 누워서 책을 펼치면 퀴퀴한 먼지가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누렇게 바랜 종이 위 활자가 빚어내는 순백의 세계가 눈부시고 따뜻했다. 글자, 종이, 활자가 완벽하게 투명해지고 그 건너편 니가타의 겨울 모습이 보인다.

매체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완벽하게 분리된 100% 추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책이 좋다.

일본 여행 감상

설 연휴를 이용해 어머니를 모시고 일본 간사이 지방을 다녀왔다.

10년 전 같은 곳을 여행한 적이 있다. 세부(細部)를 보지 못하는 여행객의 시선 탓이겠지만 오가는 풍경, 수 층을 자랑하는 도다이지(東大寺) 본당의 기둥, 기요미즈데라(靑水寺)를 올라가는 계단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수 백년 동안도 변하지 않은 유적 사이에서 오직 나 만, 십년의 세월만큼, 그 인생의 십분지 일 이상을 늙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의 세월이건만 그 십년의 세월이 마치 진공같다. 십년 전 지겹게 먹은 야키소바 빵의 맛이 마치 몇 주 전의 기억처럼 생생하다.

아직 젊다는 말로, 건강하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이러한 현실도 저런 십년 전으로 사라져버린 소소한 기억마냥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이구나. 소년이로(少年易老)라면 청년은 얼마나 더 늙기 쉬운가. 부단하지도 않은 인생은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