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라는 허상과 개인이라는 실체

국가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위해 살아 숨쉬는 실체인 개인의 희생이 강요된다. 이러한 허상은 인간성과 동정(同情), 자연과의 공존, 미래 세대에 대한 배려 등이 없는 일체의 인간 욕망의 화신이며 그 대부분은 자본주의적 욕망으로(따라서 더 많이 가진자의 욕망이 우선시 되는)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진제를 보자. 전기 요금을 걷어서 전기를 만들 수 있는 발전소와 송전 시설을 만든다. 원유를 수입하고 태양광 발전 시설을 짓는다. 그런데 같은 전기라도 집에서 쓰는 것과, 상업용으로 쓰는 것, 기업에서 쓰는 것에 따라 요금이 다르다. 같은 전기를 다른 가격으로 거래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어야 한다. 기업에서는 대량으로 쓰는 것이므로 Volume Discount가 적용되어 싸진다? 그렇다면 상업용은 어떤가? 생산자 입장에서는 싸게 공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므로 이는 명백히 국가의 정책이자 압력이다. “발전소라는 공공재를 가정에서는 많이 쓰지 말라”는 이야기를 누진제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하고 있는 것이다.

60~70년대 중공업 중심의 경제 발전을 계획하기 위해서는 각종 산업 기반 시설에 전기가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것이 중요하고 따라서 국가가 어떤 사회적 합의를 거쳐서(물론 아닐 가능성이 크다) 누진제라는 제도를 도입 했다고 가정하자.  내가 살아온 사회가 아니므로 어떤 배경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이러한 징벌적 누진제가 걸맞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고 개선의 목소리가 커졌다. 문제는 제도 자체가 아니라 이에 대해서 국가가 개인의 목소리를 대하는 태도이다.

현재 국가의 모습은 국민 개개인 행복의 합이 총합이 되도록 하는 국가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전기를 많이 이용할 수 밖에 없는 일부 재벌 기업, 최대 이윤 추구가 목표인 공기업, 그리고 이를 묵인하고 대중의 목소리를 토론할 값어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정부라는 허상 들이 개인을 수탈하여 배를 불리고 있는 상황이다.

국가 간의 수탈과 억압, 폭력은 눈에 쉽게 보이고 이에 관심을 가질 국제사회라는 감시자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국가 내의 그것들은 이미 고도로 시스템화 되어 수탈하는 사람과 수탈 당하는 사람 다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자각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현대 사회는 그 짧은 역사 때문에 특히나 이러한 사회적 감시 기능이 잘 동작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 공동의 목표가 GDP 순위를 10위권 이내로 끌어올리는 것 등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한 목표는 결코 달성 될 수도 없고 사회의 부를 증진 시키지도 못한다. 그리고 ‘허상’이 주체가 되는 목표는 반드시 개인의 희생을 동반한다. 그리고 실제 GDP 순위를 10위권 내로 끌어올리는 것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그 목표는 개인의 부를 증진 시키는 것에 맞추어야 한다.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나의 아이가 살아가야 할 사회는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어야 하고, 사회적 압력이 최소로 행사되어야 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난 본성 그대로, 자라면서 보고 들으며 형성된 작고 부서 지기 쉬운 가치관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얻어진 성취 들이 다시 사회 전체의 양적, 질적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이 것이 바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이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미국식 성공 모델의 핵심인데 그 들은 어디서 답을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업에서의 창의성

기업에서의 창의성이란 요구 사항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들어낸 그것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이 더 멋지게 수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업은 직원에게 (말로는) 창의성을 요구한다. 사실 창의성이라기 보다는 경영진이 생각하지 못한 문제에 대한 더 나은 해결책을 가지고 오는 능력을 원하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을 ‘창의적’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기업의 보편적인 속성인 권위주의, 관료주의는 창의적이란 말과 극단에 위치한다.

기업이 창의적인 직원들로 가득차 새로운 아이디어가 흘러넘치려면 방법은 두 가지다. 채용 시 정말 창의적인 사람을 뽑고, 일하면서 창의적이 될 수 있도록 조직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두 가지 다 성공적이어야 한다.  정말 창의적인 사람을 뽑는 것도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인사팀에 맡겨두고, 우선 창의적이 될 수 있는 조직 문화란 무엇인가? 여러가지 조건이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규칙은 기본 욕구로부터의 해방이다.

내가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 한국 사회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착실하다는 소리를 듣고 사회에 진입한 보통의 사람들은, “내가 어떤 일을 해도 나와 내 아이들이 먹고 사는 것에 지장이 없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겨야 창의적이 될 수 있다. 내가 외적 그리고 내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행동이 일으키는 결과가 나에게 피해를 주어서도 안된다. 보통 사람들이 창의성을 발휘하려면 기업은 ‘너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아이디어를 내도 너를 자르지 않고 보호해 줄게’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 반대인데 이는 위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현대의 권위주의적인 기업이 가진 속성이 창의성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직원에 대한 보호와 보장이 부족한 환경에서는 자연스럽게도 집에 돈이 아주 많거나, 이직이 쉽거나 평생이 보장되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가정 교육을 매우 잘 받아서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들이 더 창의적이다. 위의 사람들이 더 많은 권한을 가진 조직은 반드시 아래에 있는 사람의 자유를 제한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조직 문화로서 창의성을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은 기업 내 권력의 배분과 자유의 보장 문제로 환원 된다.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 남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권리(이 둘은 결국 하나이지만)를 기업 내부에서 어떻게 분배하는지에 따라 창의적인 조직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되는데 극도로 제약이 심한 직원들의 업무 환경, 상명하복식의 문화, 실무자와 결정권자의 엄격한 분리, 결과에 대한 문책을 피하기 위한 수많은 Paper work 등 국내 유명 대기업들의 행태를 보면 사실 그들은 창의적인 조직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대부분의 기업이 사실은 조직의 창의성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창의적인 기업이라는 이미지만을 원한다. 또한 기업의 계급화된 조직은 본질적으로 창의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꼭 창의적인 기업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직원이 창의적인 기업은 근로자들의 유토피아로서 유명세를 탈 수는 있지만 우두머리가 창의적이고 조직원은 창의적이지 않은 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Market)은 항상 무엇의 극대화를 요구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조직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