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세이지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예술은 인간 정신 속의 단단한 알맹이 같은 것이 빛이 어떻게 산란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이 그림, 음악, 소설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을 빗어내는 탁월한 솜씨를 가진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그 단단한 알맹이,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묘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보스턴 심포니가 내는 소리의 미려함(현악이 부각되어서)과 무라카미 하루키 글의 매끈함(아마 글의 리듬감 때문일 것이다)은 묘하게 닮아있다. 이는 두 거장의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다라던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표현된 결과라는 것이 나타난 것이고 결국 예술혼을 가진 두 사람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둘을 좋은 친구로 만들어준 것이 바로 이러한 공통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대부분 읽어서 더 읽을 것이 없지만, 오자와 세이지와 보스턴 심포니의 말러는 들어봐야겠다.

인스타그램이 사회악인 이유

생존과 관련된 일차적 욕구들이 생기는데에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 없다. 배가 고파서 무엇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침대에 누워 천정을 보다가도 생긴다.

하지만 조금 더 복잡한 욕구들은 보고, 듣고, 느낀 외부 자극에 의해 생겨난다. 꽃보다 할배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봤기 때문에 유럽에 가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막연한 일차적 욕구를 보통 Needs라고 하고 구체적 대상이 존재하는 욕구를 Wants라고 한다. 정보화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Needs 보다 Wants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며 이는 욕구 충족에 관해 현대인이 점점 더 불행하다고 느끼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보통 Needs 보다는 Wants가 더 충족시키기 어렵다.

더 다양하고 실감나는 미디어 덕택에 구체적 대상을 가진 욕구는 더 강하게 자극 된다. 이를 촉발하는 미디어는 무제한으로 복제되어 실시간으로 우리의 삶에 끼어 든다. 우리가 고요하고 물질에 초연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주지 않으며 끊임없이 욕구를 자극하거나 적어도 불안을 유발시킨다.

반면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재화는 그 반대이다. 무제한으로 복제 가능한 디지털 재화나 아주 저렴하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 보다는 실물을 만질 수 있고, 누구나 가질 수 없으며, 고가의 재화 일수록 소유욕을 더 강하게 자극한다.

따라서 우리가 욕구를 가지는 대상은 희소 자원으로 옮겨가고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떨어진다. 흔히 문제(problem)를 기대 수준과 현실의 차이라고 정의하는데 이를 빌어 삶의 만족도를 기대 수준과 현실의 차이라고 정의한다면 삶의 만족도, 즉 행복은 점차 떨어진다.

인스타그램 속 멋진 차, 날씬한 몸매, 부유해 보이는 집은 그 사람 하나의 소유지만 수백만 명의 스마트폰으로 복제되어 그들의 욕구를 자극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멋진 차를 소유한 한 사람이 느끼는 우월감과 행복의 무게, 그리고 나머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느끼는 불만족의 무게를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가 압도적으로 무거울 것이다.

소통되는 미디어의 속도와 양을 이를 충족하기 위한 재화가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그 차이 만큼의 불행, 나는 이것이 정보화 시대의 가장 큰 부작용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