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ist] Nuts! (땅콩)

대한항공 회장의 딸이자 부사장인 조현아씨는 JFK에서 서울로 향하는 항공기의 이륙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그녀는 “항공기를 게이트로 되돌리고 마카다미아 넛츠를 어떻게 서빙하는지에 대한 그녀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승무원 한명을 하차 시키라고 명령했다.” 가디언은 조현아 부사장은 승무원이 먼저 그녀가 땅콩을 원하는지 묻지 않고, 접시가 아닌 종이 봉지에 담아 가져다 준 후부터 소리지르기 시작했다는 레포트를 인용했다.

물론 땅콩은 비행의 중요한 부분이다. (아폴로 비행사인 Alan Shepard는 달까지 땅콩을 가지고 다녀왔다. 지구의 바에서 취해있는 스티브 맥퀸에게 보여줬다면 틀림없이 먹으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늑한 캐빈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대한항공은 조현아 부사장이 비록 승객으로서 탑승했지만 서비스 수준을 확인하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항공기 고객 서비스 매뉴얼의 어떤 페이지에서 지상 주행 중인 항공기를 게이트로 되돌리는 것을 요구하고 11분간 비행기를 지연시키는 것이 잘못된 그릇에 스낵을 담아 주는 것에 대한 400 명 고객에 대한 응대라고 제안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또한 조현아 부사장의 행동이 합법적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한번 탑승하고 나면 승무원들은 기업의 고위급 임원이 있던 없던 오직 파일럿의 지시에만 따라야 한다. 대한항공은 이 경우 조현아 부사장의 요청에 따라 기장이 기수를 돌렸다고 말한다. 가디언 리포트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가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땅콩에 대한 집착과 뒤따르는 대중의 조롱이 자신들의 큰 손실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http://www.economist.com/blogs/gulliver/2014/12/korean-air-and-flight-delays

강요하는 사회

내가 누군가를 정의할 때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과, 사회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내가 미루어 짐작하는)의 두 가지 시선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가 바라는 나, 사회가 바라는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비록 지금은 문제가 없지만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운동을 한다면 나 자신을 위한 운동이고, 연예인과 같은 몸이 되고 싶어 운동을 한다면 이는 사회적 시선을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행동에는 두 가지 목적이 섞여있다. 예를 들면 고가의 외제차이자 안전의 대명사 볼보의 차를 구입 한다고 했을 때, 이는 사회적 나를 위한 과시적인 소비와 나의 안전 욕구가 섞여서 내려진 결정일 것이다. 문제는 어느 것에 중심을 둘 지 인데, 제한된 시간, 제한된 재화로 할 수 있는 행위들을 선택할 때 내가 생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발전 시킬 것인지 사회가 생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발전 시킬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내 생각에 한국 사회는 사회에서 바라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이 크다. 이런 인식은 언론이나 지인과의 대화에서 자주 살펴볼 수 있다. 보편적 생각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얼마전 LVMH(Moët Hennessy Louis Vuitton) 그룹의 지역 별 매출 분석 자료를 살펴보았는데 인구 수나 개인 소득 대비 한국, 중국, 일본의 매출이 타 국가 대비 월등하다. 사실 많은 명품(Luxury Goods) 브랜드의 아시아 지역 매출의 성장세는 독보적이다.

이런 사례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중요시하는 사회를 잘 보여준다. 이를 단순히 태생이 그러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종족 특성’이나 ‘허영심 가득한 한국인’으로 포장하는 것 보다 왜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원인을 생각해보았다. 문득 드는 생각으로는 두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었다.

첫 째로는 한국 사회의 급격한 사회 변동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사회적 지위의 욕구가 있는데 사회 변동성이 크고, 안전망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지위 상실에 대한 불안이 커진다. 이 불안의 해소를 위해 사람들은 사회적 모습과 그 견고함을 다른 이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고 이는 과시적인 소비, 허영심과 허풍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언행으로 이어진다. 이런 불안 심리 뿐 아니라 실제로 경쟁에서 도태되어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된 경우,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의 모습과 이에 대한 평가는 이전 처럼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이는 사회적 자아에 대한 과대한 집착을 유발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근 백년을 살펴보면 급격한 성장과 체제 변화에 따른 사회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개인의 가치 판단과 사회적 자아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는 사회에서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상당부분 설명할 수 있다.

둘 째로는 전체 중심의 사고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을 중요시하는 사회를 경험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서양이 종교 권력이나 전제적 군주제로부터의 독립과 인본주의의 실현을 위해 수백년 간의 개인 존중과 자유의 권리를 발전시켜 온 반면 한국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지게 된 것은 고작해야 이십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 이전의 삶이라는 것은 늘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상당한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을 받는 시대였다. 모든 사회 조직에서 공(公)을 중시하고 사(私)를 사사로이 하는 것이 권장 또는 강요 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오랜 시간의 경험이 남이 보는 나를 훨씬 중요시하는 습관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신이 되지 못하고 늘 사회에서 강요된 모습과 비교하며 자신의 가치가 떨어질까 걱정하는 모습이 현대 한국인이다.

나는 이러한 사회적 자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이 기대하는 나로 변화하려는 노력은 항상 그 노력을 배신한다. 이는 그 타인의 시선은 일관적인 고정점이 없고, 사람은 어른이 되고 시간이 흐를 수록 변화를 이루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원인으로 인해 한국인은 나이가 들수록 불행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에서 기대되는 모습은 하나 둘 씩 겹겹이 어깨 위에 쌓이는데 이를 만족시킬 에너지, 시간, 돈, 유연함은 모두 점점 사라져간다. 가족, 시간, 꿈을 하나씩 희생해가며 노력해도 사회의 기대치와 나의 모습간의 괴리는 점점 커져서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는 패배감에 사로잡혀 자존감을 잃어간다. 이는 현대 사회의 부의 분배 문제처럼 사회적 행복의 쏠림 현상이다.

자존감과 함께 행복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오래 지속되려면 나를 내부에서 찾는 편이 훨씬 더 유익하다. 일희일비의 기준은 사회에서 강요된 나의 모습을 얼마나 만족시켰는지가 아닌 나의 본질적인 모습에서 변화가 있었는지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강요나 시선에서 벗어나서 시간이 지나도 변화하지 않는 기준을 정해 이것을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평가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능숙하게 하는 외국어를 하나 쯤 배울 것, 사회적 약자를 항상 배려하고 친절하게 할 것, 철학이나 도덕적 신념을 세우고 이에 따라 행동할 것 등의 목표는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 전반에 걸쳐 이러한 문화를 만들고 사회적 강요를 완화하는 것은 쉽게 가능할 것인가? 안타깝지만 나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장 과정에서 교육과 사회화로 고정된 사고의 방식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개인 차원으로 그러한데 사회적으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더 요원한 일이다. 세대가 흐르고 사회적 가치가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여야 한다. 새로운 사고와 가치를 추구하는 세대가 사회의 주류가 되기를 기대하며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에 대한 교육과 규범, 제도, 법 등 변화의 유인책을 정비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