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ist] 정치가들을 풍자하기 (Lampooning the pols)

Lampooning the pols

지금까지 논외였던 대상에게까지 번지고 있다

Jan 21st 2012 | SEOUL | from the print edition

북한의 김일성 왕조를 조롱하는 것은 오랫동안 (구소련 연방 밖의) 풍자가들의 결과물이었다. 코메디 프로그램 “Team America”에서의 고 김정일의 묘사를 생각해보거나, 또는 그의 아들에 대한 헌정 웹사이트 “뭔가 보는 김정은”을 검색해보자. 하지만 이제 비무장 지대 남쪽의 남한도 예상외로 풍자의 붐이 새롭게 일어나는 장소가 되고 있다.

25년 간의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유교문화는 상의하달식이고 경의를 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권력자에 대한, 특히 비꼬는 풍자는 사회적 충격을 주는 지속적인 힘이 있었다. 여기에 지나치게 엄격한 명예훼손 법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 비록 당신의 비판이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유죄로 판명될 수 있다.

이제 한 용기 있는 반역자가 그의 팟캐스트를 통해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작년 4월 김어준은 보수적인 대통령 이명박  “각하”를 비웃기 위한 목적으로 특별히 “나는 꼼수다”를 만들었다. 그는 1000만 명의 청취자가 있다고 주장하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Podcast 이다.

이 팟캐스트의 줄임말 “나꼼수”는 떠들썩한 유머와 조사할만한 부정부패의 폭로들로 뒤섞여 있다. 김어준씨는 이 조합을 “약에 설탕을 타는 것”에 비유한다. 이 약은 강력할 수 있다. “나꼼수”는 현 여당인 한나라당의 한 국회의원의 사무실에서 10월 서울 시장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는 목적으로 선거 관리 위원회의 웹사이트를 해킹하려는 공격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폭로했다. 이 스캔들은 4월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커다란 해를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김어준씨는 나꼼수가 음지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주류 미디어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는 한국의 언론에 대해 “국가 검열의 증가”와 “정부의 뉴스와 정보 컨텐츠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시도”를 인용하며 오직 “부분적 자유”라고 묘사한다. 텔레비젼과 출판매체의 언론인들이 권력자들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안에 대한 요구가 있는 것이다.

그나마 현재는 “나꼼수”와 같은 것들의 영향이 주류 유머로까지 퍼져가고 있다. 이들로 인해 텔레비젼 코메디가 지루하고 한 물 간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 20대의 여성 팬을 말한다. 미국의 현 상황에 대한 코메디 프로그램 “Saturday Night Live”의 한국판과 같은 것이 12월 시작됐다. 슬랩스틱이나 안전한 주제를 다루는 것으로 알려진 장수 꽁트 쇼 “개그 콘서트”는 정치적인 주제에서 웃음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지난 11월 전 한나라당 의원 강용석씨는 “개그 콘서트”의 한 코메디언을 “국회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이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사람을 매수하고, “전통 시장에 딱 한번 방문해서 할머니랑 악수 한 다음 국밥 한 그릇만 먹으면 됩니다. 평소에는 안 하던 일일지라도” 라는 발언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에 대해 겁먹기는커녕 이 쇼의 작가는 한 에피소드 전체를 강용석 의원의 고소를 조롱하는 내용으로 채워버렸다.

이 국회의원은 고소를 취하했지만, 김어준의 동료 중 한 명은 법에 대해서 그렇게 운이 좋지는 못했다. 지난 달 “나꼼수”의 멤버 중 한명인 정봉주씨는 대통령 이명박이 과거의 사기 계획에 연루되어 있다는 잘못된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12개월 형을 선고 받았다.

바뀌어가는 현실에 대한 표시로, “나꼼수” 그 자체가 이제는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MBC 방송국은 “나는 하수다”라 불리는 “나꼼수”의 조롱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우리는 주류를 패러디하고, 이제는 주류가 우리는 패러디 합니다” 김어준씨는 사무적으로 말한다. 그는 고소를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의 각하를 철저하게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Economist] 코닥의 마지막 순간? (The last Kodak moment?)

The last Kodak moment?

코닥은 죽음의 문턱에 와있다. 오랜 라이벌 후지필름은 잘나가고 있다. 왜?

Jan 14th 2012 | NEW YORK AND TOKYO from the print edition

레닌은 자본주의자들은 그들의 목을 매달 로프까지 팔 것이라고 비웃었다. 이 인용은 얼토당토 않게 들리지만,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점도 있다. 자본주의자들은 그들의 사업을 망쳐버릴 기술을 종종 개발하곤 한다. Eastman Kodak이 딱 들어맞는 예이다. 그들은 1975년 세계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를 만들었다. 이 기술은 카메라 수를 2배나 증가시킨 스마트폰의 개발을 가져왔고, 코닥의 오랜 필름과 카메라 제조 사업을 거의 죽음에 이르게까지 망쳐놨다.

어울리지 않는 회상이지만 코닥은 그 시대의 구글이었다. 1880년에 설립된 코닥은 선구자적인 기술과 혁신적인 마케팅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당신은 버튼을 누르고, 나머지는 우리가 합니다.”는 1888년 그들의 슬로건이었다. 1976년까지 코닥은 미국에서의 필름 판매의 90%, 카메라 판매의 85%를 점유했다. 1990년대까지 코닥은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5개의 브랜드 중에서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 이후 디지털 사진이 필름을 대체하고, 스마트폰이 카메라를 대체했다. 코닥의 매출은 1996년 160억 달러, 그리고 이익은 1999년 25억 달러에서 정점을 찍었다. 애널리스트들의 합의된 예상으로는 그들의 2011년 매출은 62억불이라고 한다. 코닥은 2억 2천 2백만 불의 3분기 적자를 발표했다. 그들의 최근 3년간 9번째 사분기 적자였다. 1988년 코닥은 세계적으로 145,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마지막 집계에서 그 수는 십 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코닥의 주가는 작년 거의 90%나 급락했다.


지난 몇 주간, 코닥이 그들의 지적 재산권 포트폴리오를 재빠르게 매각하더라도 결국 파산 할 것이라는 소문이 코닥의 기업 도시 Rochester 근처에 나돌고 있다. 1월 10일에 두 가지 발표가 있었는데, 하나는 코닥이 2개의 사업부로 재편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애플과 HTC를 다양한 특허권 침해로 고소한다는 것으로 낙관론자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재편은 파산을 위한 준비 단계일 수 있다.

코닥이 고전하는 동안 오랫동안 라이벌이었던 후지필름은 잘 나가고 있다. 두 기업은 많은 공통점이 있다. 둘 모두 자국 시장에서 독점에 가까운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코닥은 미국에서 필름을 팔았고, 후지필름은 일본에서 그랬다. 1990년대 미국과 일본의 무역 마찰 중 상당 수는 후지필름이 미국에 저가의 필름을 판매하는 것을 막으려는 희망으로부터 나왔다.

두 기업 모두 그들의 전통적인 사업이 쇠락해 갈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코닥이 지금까지도 적절히 적응하는데 실패한 반면, 후지필름은 그들을 탄탄하게 이익이 나는 사업으로 변화시키고 불황에도 불구하고 코닥의 2억 2천만 불에 비해 126억불이라는 시가총액을 만들어냈다. 왜 이 두 기업은 이리 달라진 것일까?

양쪽 모두 변화가 오는 것을 보았다. Rochester 대학의 Simon School of Business 에서 강의하고 있는 코닥의 전 사장 Larry Matteson은 2010년까지 정부의 시범적 도입에서 출발하여, 프로 사진 작가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중 시장으로, 필름이 디지털로 시장의 각각 다른 부분들에서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에 대한 자세하고 상당히 정확한 보고서를 1979년에 작성했던 것을 회상한다. 그의 예측은 단지 몇 년이 틀렸을 뿐이다.

후지필름 역시, 디지털이 가져올 변화의 운명을 1980년대 일찍이 예측했다. 그들은 세 갈래의 전략을 세웠다. 필름 사업에서 최대한 많은 매출을 쥐어짤 것, 디지털로의 변환을 준비할 것, 그리고 새로운 사업을 개발할 것. 두 회사 모두 디지털 사진 자체는 그렇게 이윤이 많이 남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다. “현명한 사업가라면 1달러에 70센트 남기는 장사에서 많아 봐야 5센트 남기는 장사로 빨리 옮겨가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Matteson은 말한다. 하지만 두 회사 모두 적응해야 했고, 코닥이 더 느렸다.

안주하는 문화

그들의 문화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많은 연구에의 투자, 제조에의 엄격한 접근, 지역 사회와의 좋은 관계 등 그들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코닥은 현실에 안주하는 독점가가 되었다. 이 약점은 코닥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후지필름이 1984년 LA올림픽의 스폰서를 따내면서 노출되었다. 언론은 후지필름의 훨씬 저렴한 필름이 코닥의 자국 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도왔다.

코닥의 변화가 늦었던 또 다른 이유는 경영진들이 “최첨단의 마인드로 만들고, 런칭하고, 수정하는 것 대신 완벽한 제품에 대한 집착으로 고통받았기” 때문이라고 코닥에 조언을 주고 있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Rosabeth Moss Kanter는 말한다. 하나의 기업도시에서 일하는 것 또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Rochester에 있는 코닥의 사장은 코닥에 대한 비판을 잘 듣지 못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코닥이 사업을 다각화한다고 결정했을 때도, 첫 번째 기업 인수가 있기 까지 몇 년의 세월이 걸렸다. 코닥은 널리 인정받는 벤쳐 투자 회사를 세웠지만, 큰 성과를 이루어내기까지 충분히 큰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Kanter는 말한다.

나쁜 운도 한몫 했다. 코닥은 그들의 연구원들이 필름에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수천 종의 화학물질들이 의약품에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닥의 의약품 제조는 흐지부지되고 1990년대 매각되었다. 후지필름은 사업 다각화를 더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필름은 피부와 일견 유사하다. 양 쪽 모두 콜라겐을 함유한다. 사진이 산화되면서 색이 생기듯, 화장품 회사들도 피부가 항산화 물질에 의해 보존된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후지필름은 200,000 종의 화학원료 도서관이 있고, 그 중 4,000 종이 항산화 물질에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후지필름은 Astalift라는 화장품 라인을 런칭하고 아시아에서 판매를 개시했으며 유럽은 올해 런칭 예정이다.

후지필름은 전문 필름 분야에서도 돌파구를 찾았다. 예를 들어, LCD 평판 스크린을 위한 광학 필름 제조가 그것이다. 2000년부터 40억 불을 이 분야에 투자했으며 이는 성공적이었다. LCD의 시야 각을 확장시키는 특정 필름 분야에서는 후지필름이 100% 시장 점유율을 누리고 있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코닥의 사장이었던 George Fisher는 그들의 전문성이 화학이 아닌 이미징에 있다고 결정했다. 그는 디지털 카메라들을 생산하고 소비자들이 사진을 온라인을 통해 포스팅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했다. 현명한 사장이라면 이 아이디어를 Facebook 과 같은 것으로 전환했을지 모르지만, Fisher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코닥을 더 재빠르고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었던 많은 제품의 아웃소싱에도 실패했다. 그는 “면도날” 사업모델로의 변화에도 노력했다. 코닥은 저가의 카메라를 팔고, 소비자들이 많은 비싼 필름을 사는 것에 의존했다. (마치 질레트가 면도기 자체가 아닌 면도날을 팔아 돈을 버는 것처럼) 이 모델은 디지털 카메라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코닥은 결국 많은 사업을 디지털 카메라가 아닌 곳에서 벌였지만, 이는 카메라 폰이 이를 망쳐놓을 때까지 몇 년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코닥은 새로운 시장을 읽는데도 실패했다. 코닥은 새로운 중국의 중산층들이 많은 필름을 구입하기를 원했다. 잠시는 그랬지만, 곧 그들은 디지털 카메라가 더 멋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카메라가 없는 사람들이 디지털 카메라로 바로 건너뛰었다.

코닥의 리더쉽은 일관성이 없었다. 그들의 전략은 새로운 최고 경영자에 따라 매번 수정되었다. 가장 최근인 2005년 취임한 Antonio Perez는 디지털 프린팅의 강자로 코닥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전 직장 HP에서 배운 것으로 코닥은 이를 통해 살아날 수 있다고 아직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한 애플과의 소송 등 코닥의 방대한 양의 지적재산권으로 수익을 올리려 노력해왔다.

후지필름에서도 기술의 변화가 내부의 권력투쟁에 불을 붙였다. 처음에는 소비자 필름 사업부 사람들은 다가오는 위기에 맞서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종적인 승자는 이들을 디지털 공습을 잘 대비하고 있지 못하다며 “게으르고”, “무책임하다”고 꾸짖은 Shigetaka Komori 였다. 2000년과 2003년 지속적으로 임명된 사장인 그는 빠르게 회사 전체를 재조직하기 시작했다.

상승하는 후지필름

그는 2000년부터 40개 회사에 90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그는 비용을 절감하고 인원을 감축했다. 18개월 동안, 구조조정 비용 중 2천 5백억 엔 (33억불) 이상을 감가상각 비용으로 잡았고, 필요치 않은 유통 조직, 개발 연구소, 관리자, 연구자를 해고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Komori는 말한다. “하지만 그 상황 그대로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즈니스 모델을 재구성해야 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선제적 행동은 비록 넉넉한 배당금으로 반대를 약화시킬 수는 있지만 일본 기업에서는 전형적이지 않은 경우이다. 일본의 관리자들 중 재빠르고, 대량해고를 하며 거대 기업 인수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고 일본 매니지먼트 컨설팅의 설립자 Kenichi Ohmae는 관찰한다.

Komori에게 이것은 그를 뽑아서 임명했던 그의 전임자가 했던 일을 거꾸로 돌려놓는 것이고, 이는 일본에서는 크게 터부시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Ohmae는 단기간의 성과를 위한 주주들의 압력이 적은 점과 많은 양의 현금 보유를 가능케 하는 일본 기업들의 오래된 문화는, 후지필름이 Komori의 비전을 이행하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미국의 주주들은 그렇게 관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코닥이 변화를 거부하는 전형적인 일본 기업처럼 행동했고, 그 동안 후지필름은 더 유동적인 미국 기업처럼 행동했다.

Komori는 “존경받는 경쟁자”의 고난에 대해서 “유감과 회한”의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코닥이 현실에 안주해있다고 힌트를 주었고, 이 것은 코닥의 어려움이 확실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코닥은 그들의 마케팅과 브랜드에 너무나 확신이 있었고, 따라서 더 쉬운 길을 선택했다고 Komori는 말한다.

2000년대, 코닥은 자체 기술 개발에 시간과 돈을 쓰느니 이미 성숙기에 있는 사업을 사는 것에 애를 썼다. 그리고 이를 통해 충분히 사업을 다각화 하는데 실패했다. “코닥은 디지털 기업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이는 작은 사업이었고 대기업 전체를 뒷받침 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았다” 라고 Komori는 말한다.

아마 그 도전이 단순히 너무 거대했었다. “그것은 너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거대한 만을 건너야 하는 기업을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영향력 있는 경영 서적 “혁신가의 딜레마”라는 책의 저자 Clay Christensen은 말한다. “그렇게 근본적으로 다른 기술이 나타났고, 기존 기술을 이용해 그 도전에 맞설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코닥의 실수는 미국의 컴퓨터 제조사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의 관리자들의 그들의 편안한 의자에서 꾸벅꾸벅 조느라 개인용 컴퓨터의 중요성을 알아차리는데 실패했을 때의 상황과는 다르다. 그것은 “쯔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았다고 Christensen은 말한다.

다른 산업에서의 시장 지배적인 기업이 작은 충격에 도산하는 일이 있어왔다고 그는 지적한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316개의 백화점 체인 중 현재 Dayton Hudson 만이 현대 사회에 잘 적응 하여 살아남았고, 이 것은 단지 그들이 Target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계적으로만 변화하는 사업에 창조적인 파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것이다. 비록 공급 체인이 인식할 수 없는 사이 변화했지만 50년 전으로부터의 시간 여행자들에게도 현대의 상점은 별로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코닥이 현재의 불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몇몇은 코닥이 스마트폰 카메라에서 “Intel Inside”와 같이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는 브랜드로서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Canon이나 Sony가 더 뛰어난 지적 재산권을 가지고 이를 이루기 위한 더 나은 위치에 있었고, 둘 다 아직 이를 이루지는 못했다.

사람과는 다르게, 기업은 이론상 영원히 살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젊은 시절 사망하는데, 왜냐하면 기업의 세계는 일반적으로 사회화는 다르게 목숨을 건 싸움이기 때문이다. 후지필름은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살아남았다. 200년 이윤의 60%를 차지하던 필름 사업이 사라졌지만, 새로운 매출을 찾아냈다. 코닥은 그 전의 많은 위대한 기업과 같이 단순히 그들의 전철을 뒤따라 가는 것으로 보인다. 설립된 후 132년,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희미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