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지람을 원해

학생 때에는 꽤 혼났다. 혼났다라기 보다는 “뭐뭐를 하면 안된다.” 정도의 가이드였지만 그래도 그때는 뭔가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이 명확했고 그것에 따라서 착실하게 벗어나지 않고 살면 뒤쳐지지 않는, 뭐 조금만 열심히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가면 남들보다는 앞서간다고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보니, 나에게 어떤 가이드나, 내가 잘못했을 때 명확하게 “무엇이 잘못이니 어떻게 고쳐”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학생과 선생님, 자녀와 부모 같은 절대적인 지시와 복종의 인간관계라서 피지배자의 지배자에 대한 영향력이란 것이 미미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자신의 포지션을 경쟁하는 사회란 곳은 그렇게 크건 작건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서로 조심스럽다고나 할까. “넌 뭐가 잘못됐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할 만한 상대방에 대한 책임감과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정말 더 중요하다. 뭐가 잘못되어가고 있는데 그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요즘의 상황이라면 이러한 선생님이나 아버지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더 이상 그러한 역할을 해 줄 존재가, 완전한 멘토가 내 주위에는 더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휘정씨 뭐가 잘못됐으니까, 어떻게 해.”라는 그런 한마디가 요즘은 그리워진다.

 

수 많은 과거의 부스러기들

때로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사건이 오랜 시간이 지나보면 별 것 아니었었다는 생각이 들때가 종종 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듯한 실패나, 반대로 엄청난 행운들도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융해 되어서 그저 삶 속에 녹아드는 자잘한 점토 조각들에 불과하게 바뀌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진짜 나의 현재를 만들어왔던 것은 크던 작던 이러한 개별의 이벤트들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조금씩 나에게 영향을 끼쳐 만들어져 왔던 것이 대부분이다. 내가 친구를 대하는 태도, 내가 일을 대하는 태도, 내가 나의 육체를 대하는 태도, 내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 어떻게 보면 나만의 주관이자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부분들이 결국 현재의 나를 빚어내고 내가 속한 주위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결론적으로 인생 전체를 바꾸는 것은 (물론 시간은 걸리겠지만),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커피에 넣는 소금의 양, 아침에 누군가를 만났을 때 활짝 웃는 웃음의 정도, 컴퓨터 폴더의 정리 습관 같은 것들이다. 작지만 큰 것, 아니 전부인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