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조그만 다이어리에 일주일 마다 있는 미팅의 내용을 기록할때마다 ‘아 뒷장들이 얼마 안남았네’라고 느끼고 올해의 반환점을 돌았음을 실감하고 있다. 또 잠이 덜 깬 아침에 스쿠터를 타고 학교를 오를 때마다 어제와는 다른 쌀쌀함에 사뭇 잠이 깨고는 산이 불러온 빠른 가을을 실감하고 있다. 또 조금 시간이 지나면 온통 단풍잎 휘장으로 갈아입겠지. 작년에 이 장소에 집중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순식간에 변화하는 LED 불빛같은 그 모습을 미처 못보았는데, 올해에는 조금 더 바닥을 보고 앞을 보고 눈을 깜빡이지 말아야지.

늘 두려움을 느낄 때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불현듯 인식하게 될 경우이다. ‘아 이 정도 노력으로 충분하겠지’했던 문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것이어서 좌절을 맛볼 때의 경험이라던가. 오래전에 묵혀놨던 미해결의 무엇인가를 꺼내어 자신을 다시 테스트 해보는 일에서 전혀 변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라던가. 육체의 불변함을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무엇인가 정신적으로 불변하는 것이 오래가면 두려움을 느끼고 변명거리를 찾게 된다.

초조한 마음에도 가는 시간을 붙잡아 둘수는 없고 늘 언젠가는 평가받아야 되는 시기가 오기 마련이다. 초등학교 때의 구구단과 같은 간단한 숫자 들에서 20년의 세월을 거쳐서 어느덧 더 커다란, 어린 시절의 9와 같은 엄청나게 커다란 수가 몇 번이나 곱해진 것 과 같은 크기로 나를 압도하는 어떤 시험이랄까 시련이랄까. 나는 고작 조그만 꼬마에서 고만고만한 키로 자랐지만, 내 앞에는 한시간에서 하룻밤이 되고 책 한권이 되고 한달이 되고 부풀어오른 사전이 되었다.

박태환 선수의 1600M 자유형 경기에서 발견한 것처럼, 모두가 같이 시작하고 모두가 최선을 다하지만, 누군가는 200M에서 지치고 누군가는 400M에서 지치고 누군가는 믿을 수 없게 지치지 않는다. 0.1초에 숨을 참으며 물속으로 뛰어들던 선수들이, 옆 레인을 보며 팔을 더 멀리 뻗고, 발을 더 깊게 차서 앞서 나가려고 애쓰던 선수들이 결국은 양 옆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물 속에서 혼자 터질 것 같은 폐를 억누르면서 그렇게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나는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미리 해야되고 많이 해야되고 오래해야 되고 또 여분을 준비해야된다. 또 빠르게 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조금씩 조금씩 변화해 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지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꾸준히 자신에게 타일러 왔다. 때로는 오랜 기간을 변하지 않는 자신에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옳은 쪽으로 변화해왔다는 자긍심은 가질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한다. 이 블로그에 아주 오래된 글을 볼때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만큼 변했고 그만큼 성장했다고 느낀다.

20대의 가을에 있다. 겨울을 준비하려면 역시 땔감을 많이 모으고 먹을 것을 저장해 놔야한다. 하나 다행인 것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앞 사람의 등과 뒷 사람의 코 뿐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서도 따뜻한 햇살을 비춰주는 20대의 한여름이 고맙게도 곁에 있다는 것이다.

놀라울 정도의 보편성과 또 역시 놀라울 정도의 다양성

사람을 연구하는 일이란 참 어렵고 종잡을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비록 나는 지금까지 주로 컴퓨터를 대하는 일과 공부를 해와서 딱히 사람을 대하면서 놀라울 정도의 당황스러운 경험을 해본 적은 많지 않지만 다른 몇몇의 경우에서 조심스러운 유추를 통해 위와 같은 생각을 얻고 내가 그러한 공부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도 종종 하곤 한다.

사람을 연구하는 일이라는 것도 여러가지 분야가 있겠지만, 역시 물건을 파는 상인에게도 그렇고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위해 노력하는 청춘남녀들에게도 그렇고 사람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행동 예측에 어떠한 논리성이나 결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함수처럼 입력을 넣으면 늘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또 늘 입력을 동일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아주 근거가 희박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 예를 들면 ‘누구나 자신에게 경제적인 이득이 오는 것을 좋아한다.’ 라던가 ‘성욕은 남성이 여성보다 강하다.’ 등등에 의존해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측에 의한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언제나 Case by Case 이다. 인간 행동 예측에는 놀라울 정도의 보편성과 역시 놀라울 정도의 다양성이 공존하는데, 이러한 것에 대하여 보통은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거의 미신에 가까운 예측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손님을 그냥 보내고, 사랑에 실패하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러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다양성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의외성에 당황하기도 하고 두려움을 느끼기도하고 간혹 흥미진진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당사자가 되면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의외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행동을 하고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면에서는 각자 통일되는 면이 없이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했던 믿음을 깨버리기도 하고 말이다. 사람의 저 깊은 어딘가에는 다들 공유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봐도 쉽지 않은 일이고, 또 인간으로서 다른 표정과 행동을 하고 있지만 서로 투영되는 하나의 상을 찾기도 하고, 또 이런일들이 반복되고. 혼란은 더해져가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인간들의 변덕에 질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자 저명한 학자들은 뇌를 연구하기도 하고 통계를 연구하기도 하고 가정만 잔뜩 늘어놓는 도저히 비현실적인 환경을 만들기도 하고 이래저래 노력중이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고 많은 연구비만을 날린채 노벨상 몇개만 늘어놓은 듯 하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그런게 가능해?’라고 묻고 싶지만 그들은 또 5년내에, 10년 안으로는 꼭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나도 공부하는 입장이라서 그런 말들이 어떤의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만..

그래도 이러한 불예측성(?)이 인간사의 드라마를 만드는 재미가 아닌가 싶다. 노력의 목표에 공감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러한 내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이 펼쳐지는, 그래서 자극받는 세상이 꽤나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뭐, 가끔은 너무 어려워서 불평하기도 하지만.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지만, 인간들은 늘 주사위를 던지면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