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처리유감

 얼마 전, 신문지 상에서 사립 S대에서 있었던 자그마한 성적처리 관련 소란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기사에서는 주로 학생의 교수에 대한 매우 불공손한 태도를 문제 삼았지만, 곧 이어 유포된 학생의 사과 글을 찬찬히 읽다보니 꼭 학생만의 잘못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적이라는 권력을 쥔 교수와 이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학생과의 트러블은 갈수록 심해지는 취업난 때문에 학점이라는 녀석의 중요성이 커지자 따라서 증가하는 추세다.

 나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성적 처리의 경험이 하나 있다. 인문학도들이 주로 수강하는 교양 수업이었는데, 결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한 학기였지만, 그래도 납득하기는 힘든 B+라는 성적이 나왔다. 그래서 성적 내역을 요청 드렸고 어느 부분에서 감점이 있었는지 확인 할 수 있었다. 내가 감점 된 부분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출석 점수였다. 비교적 공정하게 처리될 것 같은 출석 점수를 문제 삼는 것은 그날 결석한 사유가 ‘예비군 훈련’ 때문이었다.

예비군 훈련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학교에 있는 학군단에서 ‘결석 사유서’라는 서류를 발급해준다. 그 이유는 강제성이 있는 예비군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결석한 학생들이 그 서류를 교수님께 제출하면 이를 감안해서 출석은 인정해 주기 위해 제공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비군 훈련 보다는 학생의 수업권이 먼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국가의 방위를 걱정하는 윗 분들이 만든 제도라는 것, 싫어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이를 제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출석으로 인정하지 않고 결석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참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89점으로 B+, 1점만 올리면 A0가 되고 아슬아슬하게 30% 장학금에 걸쳐있었던 나는 이것이 출석으로 인정되면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금전적으로도 수십만원을 벌 수 있었기에 교수님에게 다시 메일로 연락을 드렸다. 아주 장문의 글이었고,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썼다. 솔직히 지금 보면 조금 웃음이 나오겠지만, 심각하게, 아주 거창하게 작성한 글이었다. 국방의 의무 부터 시작해서 예비군 훈련의 강제성,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감점된 수많은 복학생들, 남성에 대한 역차별, 결석 사유서 발급 시스템이 생긴 이유 등등 가져다 붙일 것은 다 가져다 붙였다. 그리고 실제로 만나서 꼭 말씀드리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참 만에 도착한  답메일에서 교수님의 논리는 어떤 형식으로든 수업에 참가한 학생과 수업에 참가하지 못한 학생은 성적에 차별을 두어야 하고 이는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유에서건 수업시간에 당신의 수업을 그 자리에서 듣는 자만이 출석 점수 만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두 번째 이메일에서는 예비군 훈련의 ‘강제성’에 대해서 말씀드렸고 이는 학생으로서 선택하기 힘든 국가적인 시스템에 의한 것임을 강조했다. 즉 ‘법’이 그렇게 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이 글을 길게 쓴 것에서 알 수 있겠지만, 끝내 성적은 정정되지 않았고 그 학기의 유일한 B+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두 번째 메일에 대한 답신은 그렇게 내 성적, 그리고 예비군 참석자의 성적을 올려주면 성적이 내려가야 하는 다른 수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시점에서 더 이상 클레임을 외치는 것을 그만 두었다. 교수님은 이미 논리가 아닌 동정론을 펴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은 내 논리가 통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나이 많은 여 교수님이었으므로 교수님의 ‘예비군 훈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예비군 훈련을 날짜를 선택해서 아무때나 다녀올 수 있는 시스템 쯤으로 이해를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많은 아쉬움이 있지만,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불합리한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한번 했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신문지 상에 오르내린 그 학생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레퀴엠[Requiem], 아름다운 울림

나는 항상 음악을 틀어놓고 잠에 빠진다. 그래서 늘 습관처럼 자기 전에는 CD가 정리되어 있는 조그만 책장에서 어느 음반을 들을지 고르고 CD 플레이어에 걸어 놓은채 1시간~2시간 정도 플레이가 되도록 셋팅한 후에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눈을 감는다. 아무래도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 가족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한 음악들을 틀어놓는 편이다. 최근 자주 듣던 Gustav Mahler의 교향곡 9번 중 4악장이나 다른 교향곡들의 아다지오 악장들, 혹은 Meditation이라는 글자가 크게 써있는  EMI에서 발매된 소품 음반 같은 것들이 지겨워지자 다른 음악을 찾아보고자 인터넷 탐험에 나섰다.

레퀴엠은 그러한 목적에 딱 맞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은자를 위한 미사 음악”이 원래 뜻이지만, 사실 원래 목적으로는 쓰여질 수 없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죽은 사람은 음악을 들을 수가 없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죽은 이를 위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불러주는 아름다운 음악을 못듣는 다는 건 죽은이에게나 살아남은 사람에게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어설픈 대리만족이지만 자기 전에 누워서 들으면 그나마 목적에 50%는 부합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요즘은 열심히 음반을 꺼내어 든다. 내일 아침에 또 부활하긴 하겠지만 어쨋든 잠시나마 죽은 거니까.

서양 고전음악에서 레퀴엠으로 유명한 것은 몇 개를 꼽을 수 있는데 모짜르트(Wolfgang Mozart)의 것이 하나, 그리고 포레(Gabriel Faure)의 것이 또 하나, 브람스(Brahms)의 독일 레퀴엠, 마지막으로 베르디(Giuseppe Verdi)의 것이 하나. 모짜르트는 오스트리아 사람이고 포레는 프랑스 사람, 브람스는 독일 사람, 그리고 베르디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각각의 악곡에 그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브람스와 베르디의 레퀴엠은 거의 듣지 않으니 모짜르트의 것과 포레의 것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자 한다.

모짜르트의 레퀴엠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작업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모짜르트가 완성시키지는 못하고 그의 제자였던 쥐스마이어 Lacrimosa의 후반부 이후를 스승이 남긴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성했다고 하여 사실 진정한 모짜르트의 악곡은 아니지만, 늘 활기차고 밝은 음악으로 기억되는 모짜르트의 다른 곡들과는 달리 경건함과 엄숙함이 잘 녹아 있다. 마치 그의 40번 교향곡 같은 느낌이다. 자신이 작곡한 곡이 자신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던 묘한 곡이기도 하다.

가장 인기가 있는 부분 Lacrimosa(눈물의 날)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의미 심장한 주제 동기로 적절히 사용된 부분. Celibidache가 지휘하는 Muchner Philharmoniker다.

1090758150.mp3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신론자도 아니다. 서양 사회의 기반을 흐르는 기독교를 통한 믿음이 이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음악, 또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유럽 여행을 그렇게나 갈구하게 만드는 수많은 문화적인 유산으로 표현되어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쁨을 줄 수 있으니 그 업적 만큼은 칭송 받아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짜르트의 레퀴엠도 꽤 듣는 편이지만, 그 보다는 개인적으로 포레의 레퀴엠을 훨씬 더 선호한다. 심포닉한 화음을 만들어내는데는 모짜르트의 재능이 아주 뛰어난데, 단선율의 어떤 멜로디를 가지고 엮어 내는 기술은 포레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시칠리안느(?) 같은 곡을 들어보면 특히 현악을 잘 사용하는데 이러한 간결하면서도 깔끔한 모습이 레퀴엠에는 아주 잘 어울린다고 본다. 모짜르트 만큼의 경건함은 좀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뭐 듣기에 좋은 음악이 좋은 음악이다. 묵직한 현의 울림이 매력이다.

드디어 나왔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포레의 레퀴엠중 Agnus Dei(하느님의 어린양)다.  역시 비교하기 좋게 역시 Celibidache가 지휘하는 Muchner Philharmoniker다.

1040185317.mp3

레퀴엠은 Celibidache의 음반을 즐겨 듣는데 다소 느리게 설정한 템포와 오직 라이브만을 고집스럽게 추구한 결과로 음반에서 나타나는 현장감. 특히 연주가 모두 끝나고 나서 여운을 즐기면서 천천히 여기저기서 조용하게 터져나오는 박수는 매력적인 감상포인트다. 

녹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오케스트라의 실연을 가서 들어보는 것 만은 당연히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악기의 소리보다 음반으로 들었을 때 더 손해를 보는 것은 바로 성악이다. 아무리 녹음 기술이 발달하고 재생 매체가 좋아진다고 해도 실제로 콘서트홀에서 듣는 합창단의 거대한 에너지를 재현해 내기란 불가능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합창을 실제로 들을 기회만 노리고 있지만, 아직 포레의 레퀴엠은 국내에서 연주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오르간이 없어서 그런가.

우리나라도 고전음악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서 조금 마이너한 악곡들도 연주되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지만(사실 포레의 레퀴엠 정도면 마이너 한 것도 아니다)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운전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타면 일부러 모르는 척 요즘 듣는 고전 음악을 틀어놓는데 대부분은 끄고 라디오를 듣거나, 조금 더 신나는 음악이 없냐고 물어보곤 한다. 아마 누군가 “이 음악 좋은데 무슨 곡이에요?” 라고 물어본다면 신나서 설명해주고는 매일 같이 드라이브하자고 졸라댈지도 모르겠다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