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낡은 동전 지갑

내가 꼬마였던 시절부터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돈 씀씀이에 대해서 칭찬하셨다.  “너희 아버지 젊었을 때 용돈으로 쓰라고 돈 3만원을 지갑에 넣어 주고, 몇 주가 지나서 다 썼겠거니 하고 다시 채워 넣어 주려고 지갑을 열어 보면 그 돈이 그대로 있어. 어떻게 저렇게 돈을 안 쓰고 살까?”

아버지는 그런 돈 씀씀이에 대해서 별로 닮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시면서 절약 정신이 투철한 게 아니라 돈을 잘 쓰는 방법을 몰라서라고 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아버지는 물건을 돈 주고 사 본적이 극히 드문 사람이었기에, 단지 익숙하지 않은 것 뿐이었겠지만 어머니에게는 그 모습이 근검 절약의 표상처럼 여겨 졌나 보다. 따라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고 꼬드겨도 아버지의 지갑을 보기는 정말 힘들었을 것이고 그것은 아들인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정말로 어렸을 시절 부터, 아버지는 주말이면 가기 싫어하는 아들들을 데리고 운동이 필요하다면서 관악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셨다. 그리고 가는 길, 버스를 탈 때마다 조그만 가죽으로 된 동전 지갑에서 토큰이나 동전을 꺼내어 나누어 주셨다. 관악산을 올라가는 초입에는 각종 솜사탕이나 번데기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았고, 나는 친구들과 동네에서 노는 것을 더 좋아했는데, 억지로 주말을 뺏긴 것에 대한 보상 심리로 군침 도는 그런 먹거리들을 내심 아버지가 사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아버지는 그 지갑을 꺼내어 먹을 것을 사주는 일이 없었다. 그 까만 색 동전 지갑은 오직 버스를 탈 때만 볼 수 있는, 아쉬움의 대상인 물건이었다.

얼마 전,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을 하는 날, 고인의 모든 물건을 태우는 것이라고 하여 아버지의 모든 물건들은 담아 가져온 가방을 불 길에 뒤집어 털자, 옷가지와 함께 그 까만 색 동전 지갑이 색이 바랜 낡디 낡은 모습으로 푹 불 속으로 떨어지며 순식간에 오그라들었다. 동시에 내 찰랑이던 마음에도 20년 전, 그 동전 지갑과 함께 시작해 쌓여 왔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거대한 무게로 떨어졌다. 추억과 회한, 상심 등이 범벅이 된 그 것 때문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났다. 어린 마음에 그렇게 아버지가 꺼내 주길 바라던 그 지갑을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왜 20년 동안이나 그 꼬질꼬질하게 낡은 지갑을 안 버리고 계속 쓰신 거야!” 하면서.

추억은 세월의 길이 만큼 높게 곱게 퇴적되어 현실을 지탱해 주는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축들이 꾸준히 퇴적되는 가운데 그 한 축이 더 이상 쌓아 올려 지지 않으니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덜컹 거리는 마음이 그 무엇인가의 부재를 뼈저리게 아프고 후회하게 만든다. 주위 사람들은 그 하나의 쓸모 없는 받침대를 버리고 나머지 것들로만 새롭게 인생을 꾸려 나가라고 충고하지만, 쓸모 없다고 여겨 지는 그 것이 나와 아버지가 세상에서 만든, 또 남은 유일한 공동의 작품이기 때문에 쉽사리 그러하지는 못하겠다.

수심 120cm

어느 사이엔가 ‘국내 최고 시설 수영장’ 이라는 문구에 혹해서 등록한 스포츠 센터에서의 수영 강습도 일년이 다 되어 간다. 뭔가 배우려고 했던 것 보다는 조금 더 재미있는 운동을 위해서 시작한 수영이 예기치 않은 스포츠 센터의 보수 공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은 조금 아쉬운 일. 이제야 간신히 접영을 알듯 말듯 하게 되었는데!

학교 스포츠 센터에서 느낄 수 있는 수영의 매력은 다른 게 아니라 고작 120cm의 내 어깨에 닿을까 말까 한 깊이의 물 속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느낄 수가 있다는 점이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물에 발을 담그기까지의 짧은 추위만 참아 내면 내가 평생을 살아온 공기 속 세상을 떠나 내 전신의 피부가 다른 것과 접촉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예전에도 글에서 묘사한 적이 있는데 스쿠터를 타고 지나는 터널 속이나, 혹은 수중이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소리가 들리고 또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손쉽게 즐기는 해외 여행과도 같다. 아니 어쩌면 그 보다 더욱더 급격하게 내 머리 속의 외부에 대한 인식을 스위치 시켜야 되는 격심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우주 유영을 대비해서 물속에서 훈련하는 것을 보면 ‘물 속’이라는 조건이 인간에게 주는 변화는 그렇게나 대단한 것인가 보다. 하긴 물속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으니까.

아무튼 지금은 꽤나 즐기게 된 수영이지만, 애초에 결심했을 당시의 내 상황은 평생 물 속에 눈과 코와 입을 동시에 집어 넣어 본적이 없는 맥주병이었다. 두려움에 떨며 물속에 들어갔을 때는 정말로 두근거렸는데 잠수를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 강사 분에게 충격을 받고 정말로 수영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잠수가 익숙해 진 다음에는 그 다음 문제가 첩첩 산중으로 나타나고 하나를 돌파할 때마다 한 달씩 걸리는 그야말로 끈기와 근성의 배움 길이었다. 물론 한 고개 두 고개 시간을 쏟으며 넘어왔기 때문에 지금이 이런 즐거움이 있는 거겠지만.

발로 물을 부드럽게 밀고 당기면서 두 다리 사이로 물이 빠져 나가는 느낌. 팔을 물속에 넣어 힘차게 당기면 머리부터 시작된 물살의 갈라짐이 양 어깨와 허리를 부드럽게 타고 넘어가는 느낌. 발을 찰 때 마다 등과 배의 물살의 빠르기가 서로 바뀌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느낌. 이런 것들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내 주위의 흐름이자, 또한 그러기에 더욱 뿌듯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 이러한 것들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내가 조금이나마 성장했구나. 어제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질서에 따라 세상이 움직이고 그 원인에는 나의 변화와 성장이 있구나. 그 결과는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오래 수영할 수 있는지로 손쉽게 증명되고 혼자 하는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이러한 자기 성장의 느낌이다.

아무튼 수영도 이제 당분간 안녕이다. 몸이 기억한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일단 접어서 간직하고 또 다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싶을 때 꺼내어 깊이 잠수하면 될 것 같다. 뭐, 당분간은 굳은 의지로 등록한 3개월 체련장 이용권을 썩히지 않도록 열심히 이용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