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ing something is always better than doing nothing

 20대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기초대사량이 줄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도 몸이 불어나는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하늘은 높고 말뿐 아니라 사람도 살찌는 가을이라 그런가? 늘 오르락 내리락하는 많은 계단을 위해서도 그렇고, 힘겨워 하는 스쿠터양을 보고 있는 것도 안쓰러운 일이고 해서 가능하면 좀 슬림하다 싶은 정도로 유지하고 싶은 희망이 있다. 하지만 회식이다, 친구들을 만난다,해서 어쩔 수 없이 지방질의 느끼한 식사를 하게 될 때가 있기 마련이고 그럴 때마다 잠시 머리속에서 사라지는 결심들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양의 먹고 꼭 후회하게 되어있다.

  저번 주 토요일에는 맛있게 구워지는(내가 굽는. 이겠지? 나는 고기 구울때 늘 내가 굽는다;) 삼겹살을 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식탁 앞에 앉아서 이런 고민을 하고 깨작깨작하는 모습이 한심해보여서 생각을 조금 바꿔보았다. 일단 먹고! 열량과 지방들이 공기속으로 날아가도록 운동을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그래서 저번 주 금, 토, 일 계속 술, 고기로 주지육림을 보내다가, 이번 주 한주 내내 가기 귀찮은 토요일마저도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스포츠센터에서 평소보다 놀라운! 스피드를 내고 놀라운! 거리를  달렸다. 어짜피, 집에서 자고 있을 것인데, 다소 강압적인 책임감에 사로 잡혀서 운동을 열심히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나쁘지 않군 조금 더 열심히 삶을 살게 되었어.”

  많은 것들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무엇인가를 하는 게 항상 낫다.” 고기를 앞에 두고,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그 칼로리를 계산하면서 두려움에 덜덜 떠느니, 일단 배부르게 먹고, 많이 먹었으니 그 걱정들을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하겠다는 심리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게 더 낫다. 그게 더 열심히 살 수 있게 하는 동기부여가 된다.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데 친구가 부른다고 나가 놀까, 놀지 말까를 망설이면서 책상 앞에 붙어있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나가서 신나게 놀고 돌아와서 열심히 하는 것이 낫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연애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일단 감정에 100% 충실하고 결과를 수용할 수 있도록 성숙해지는 것이 낫다.

  결과론적인 100점짜리 인생보다는 현재 진행형의 100%의 인생이 더 재미있어 보인다. 무엇인가가 머리속에서 50:50으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60:40이 되었다고 60을 응원하는 것은 수동적이고 한심해보인다. 무엇인가가 머리 속에서 싸우고 있다면 재빠르게 한쪽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항상 무엇인가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것을 100% 투구하는 것이 낫다. 행동도 감정도 그런 순수성이 있는 것이 모든 순수하지 않은 것들을 이긴다.

일회성에 익숙해지기

 나는 참 일회용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딱히 환경을 보호하자는 목소리에 공감하거나, 국가 경제를 위한다는 생각은 없다. 곰곰히 생각해봐도 적절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말이 떠오르진 않는다. 그냥,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새로운 것을 가지고 그렇게 짧은 시간동안 사용하고 영원히 그 ‘가치’를 폐기 시킨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내 머리는 그렇게 단기간에 의미를 가지고 또 영원히 삭제되는 그런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종이컵을 집어들고,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신 후에 버리기 전에 망설이는 것이다. 뭐, 무슨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내 책상위에는 늘 종이컵이 쌓여있고,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것이 몇날 며칠에 걸쳐서 입증되고 나서야 큰 마음을 먹고 쓰레기통으로 보낸다.

 왠지 이러한 조그만 녀석들의 삶에도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훌륭하게 성장했고, 어떻게 드라마틱하게 활약을 했으며, 무엇인가를 위해 장렬히 최후를 맞았다. 쓰레기통 속에서도 이 녀석이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주위 친구들에게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  고작해야 내가 버린 이 녀석이 “정수기의 물을 몇 초간 담기 위해서 세상에 존재했었다” 라는 무미 건조한 말을 하면서 자기의 삶을 요약하는 것, 또 내가 그렇게 사용했다는 것은 종이컵 자체에게나, 또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거쳐야 했을 수많은 과정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토테미즘이나 이런 걸 바탕으로 생각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냥 세상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넘쳐나기를 바라는 사람 중에 한명이다.

 비슷한 관점에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고 ‘일회성’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Talking이 아니라 Story다. 거대하고 빽빽하게 밀려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에 영향 받지 않는 하나의 Channel이 너와 나 사이에 뚫려있기를 바란다. 그 Channel을 통해 예전의 기억이 현재의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의 행동이 미래의 너와 나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상상해보자. 기적과도 같은 만남에 이어서 다시 만나고 떨어지고를 반복한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아름다운 매듭들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서 인생이 보다 풍요로워 지도록 돕는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Channel을 ‘사랑’ ‘우정’ ‘가족’등으로 한정시키는 것보다는 더~ 많은 범위로 확장하면 그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넘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현실적으로 없을 수 없는 그 ‘일회용품’ 만남에 대해서 나는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부쩍 사회적인 활동을 늘리려는 노력에 발 맞추어 이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누군가가 편리함을 위해 ‘일회용품’을 만든 것 처럼 이러한 ‘만남’도 만들어 낸 것이라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으련만, 새로운 누군가를 많이 만날 수록 다음에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은 더 적어지는 당연한 현상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시간을 소비해서 익숙함으로 적당히 가린채 살아야 하는 건지, 혹은 다른 사람이 그러한 노력을 대신하도록 성장해야 하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