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이 최고의 가치

책이나, TV나 인터넷에서 보고 들은 좋은 말도 이래저래 많고, 물질 만능 주의 시대라 돈이 최고의 가치라 칭송 받는 시대이기도 하고, 또 사람들은, 다수가 돈을 쫓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각자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서 뛰고 노력하고 있다. 주저리 주저리 말했지만, 결국 “가치관이 어떻느냐?” 하는 이야기 이다.

도덕 교과서에서 본 내용인지 어디서 본 바에 의하면 사람의 가치관은 성인이 되기 전에 형성되어서 그 이후로는 큰 변화가 없이 평생을 지속된다고 한다. 따라서 청소년기에 보고 듣고 느낀 바가 매우 중요하고 이를 올바르게 형성하기 위한 환경을 부모가 만들어 주는 것도 부모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것이다. 뭐 어쨋든 지금까지는 일반적인 이야기 였고,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의 경우는 최고의 가치는 “정직”이었다.

당장 놀 수 있는 것이 가장 즐거운 시절이고,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왜 나쁜지도 잘 몰랐던 시절부터 항상 “정직해라”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어느 정도 영향 받아서 나는 남에 비해서 꽤나 정직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부모님께 감사를 느낀다. 차라리 거짓된 것보다는 아무것도 안하는게 나은 것이다. 사실 정직이 왜 소중한 보물이 될 수 있는지는 대학교 입학해서도 한동안 잘 몰랐었는데, 그나마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하고 이루고 하는 과정에서 어렴풋이나마 나름대로 조그만 생각이라도 품을 수 있어서 적어본다.

그 비중을 놓고 보면 남을 속이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에 비해서 아주 조그만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직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정직하지 않다는 것은 옳음과 그름의 가운데를 나누고 있는 줄자를 자기 임의로 왼쪽으로 옮겼다, 오른쪽으로 옮겼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당연히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다르게 판단하며 적당히 잘못된 자신의 행동은 적당히 옳은 것으로 위장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위치한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첫번째로는 어느 방향으로 자신을 밀고 나갈지를 결정할 수도 없고, 두번째로 더 심각한 문제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데 있다. 항상 옳고 그름을 적용하는 잣대가 다르기 때문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사방 팔방으로 왔다갔다 하는데 낭비할 뿐이고, 이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다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단지 옹졸한 생각 하나만으로 무시하면서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다. 식물인간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단어다.

태어난 순간부터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그냥 그 자리에서 평생을 살면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태어남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라면 이 거대한 우주속의 물질계에서 그 축복을 선택되어 누리게 되었음으로 운명적으로 책임 지워지는 의무들이 몇 가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 의무는 인류 공동체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까지 가서 무엇인가를 얻어 오는데 있고, 정직하지 못함은 그 곳까지 가는 자신의 두 발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정직하지 못함의 해악 중 가장 큰 범위의 사고다. 전에도 말했듯이 소규모의 사회와 가족의 범위로 차츰 범위를 줄어 나가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으며 자신이 발전하지 못한 것처럼, 가족, 사회, 나라도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족쇄로 작용할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정직”이란 자연이 그런 것처럼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근본의 덕목이 아닐까 한다.

터널

스쿠터를 달려 학교에서 집까지 오는 길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폭이 넓은 큰길을 하늘을 보면서 달려오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폭이 좁은 이차선의 도로를 터널을 지나 오는 방법이다. 어느 쪽을 좋아하냐고 누가 물어보면 나는 주저 없이 터널을 지나 오는 길을 좋아한다고 답하고, 또 실제로 그 길을 지나오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여기에 얼마전 누군가가 “왜?” 라는 질문을 했고, 나는 다음 처럼 답했던 기억이 있다.

“일단 터널로 들어가면 꽉 막힌 것 같잖아? 하늘도 보이지 않고, 양옆도 두꺼운 타일로 뒤덮여 있어서 보이는 것은 저 끝의 희미한 밝은 빛이고 뒤로는 돌아갈 수가 없는 거지. 그리고 스쿠터를 타고 달려보면 알겠지만, 웅웅웅 하는 내 엔진소리가 벽에 부딪혀 반사되는 소음에 다른 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아. 오직 앞의 밝은 빛과 다른 모든 소음을 차단시키는 엔진소리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그렇다고 내가 터널 속을 달리는 것을 좋아하는 건 아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이지. 팬으로 억지로 끌어들인 답답한 터널 속의 공기가 산 속의 청량한 공기로 바뀌고, 순간 하늘이 보이면서 세상이 펼쳐지지. 그리고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웅웅웅 거리면서 귀를 시끄럽게 하던 소음이 ‘뻥’하면서 순간 고요해 진다는 거야. 나는 이 순간을 좋아하기 때문에 늘 터널을 지나다녀.”

그렇게 내 주위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변화하는 경험을 즐기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드는 의문은 과연 내가 느끼는 것 만큼의 실제의 변화인가 상상속의 변화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하루는 실험을 해보기로 작정하고, 여느 때처럼 터널에 진입해서, 좋아하는 터널을 빠져나오기 직전에 살며시 눈을 감고 귀로 들리는 소리에만 집중했다. (매우 위험한 짓이지만;) 기대했던 ‘뻥’하는 순간의 소리는 없었다. 앵콜 공연이 없는 것처럼 서운했지만, 나는 여전히 터널을 통해서 학교를 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