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얼마나 해야 할까?

대학원에 입학하면, 공부 정도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이 책, 저 책 찾아본다거나, 혹은 논문을 뒤적뒤적 거린다던가 하는 끝없이 원하는 방향을 추구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좀 다르다. 아직 1학기라 그런지 몰라도 2과목을 듣는 수업의 강도가 학부때의 전공 12학점에 맞먹는 -_-; 세기이다. 읽고 읽어도 헷갈리고, 외우고 외워도 까먹는, 무한의 시간이 투입되어야 하는 블랙홀 같은 과목들은, 그야말로 상상하던 대학원 생활과는 조금 다른 경험을 하게 해주고 있다(!). 아, 도대체 공부를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건가.

게다가 나는 다른 학부 출신이라 학부를 대표한다는 뭐랄까 사명감이랄것도 묘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대학원 학점은 중요하지 않아 적당히 하고 자기 원하는거 해” 라는 주위의 말과 “그래도 중간 이상은 가야 어디가서 손해보지 않지?”라는 마음속의 불안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그 타협점을 찾기가 어렵다.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도 있고, 또 프로젝트도 신경써야 하고, 그 외 잡일도 여러가지. 정말로 관리! 관리!를 머리속에서 뱅뱅 맴돌게 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이 처음은 아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천천히 살펴보면 도대체 공부는 얼마나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이었을 때였는데, 흔히들 All 100 이라고 칭하는 전과목 만점을 한번 받았던 기억이 있다.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산수, 국어, 사회 기타 등등 다 100이라고 빨간색으로 씌어진 시험지를 하나씩 받을 때마다 점점 기분이 좋아져서, 방과 후에 시험지를 들고 집으로 뛰어가서 마구 자랑했던 그런 기억 말이다. 다 100점이니 이제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즐거웠지만, 어머니는 계속 열심히 해서 앞으로도 100점을 받을 수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도대체 공부는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거야?”

아버지께서 그 때인지, 언젠가 했던 말씀을 나는 이 궁금증에 대한 정답으로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데, 그 정답이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때, 공부 때문에 포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만 공부를 해라.”

스포츠 선수가 박사학위까지 딸 필요는 없고, 가수로 평생을 가고 싶은 사람이 논문을 쓸 필요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를 하게 되면 그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당연한 속성인지라, 언제나 공부에 목마르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고, 결론적으로 저 말대로 실천하려면 평생 공부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힘들때마다 책을 보고 이해하고 노력하는 것은 더 높은 지식의 성을 쌓기 위해서 평생을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잘은 안되지만;

정직이 최고의 가치

책이나, TV나 인터넷에서 보고 들은 좋은 말도 이래저래 많고, 물질 만능 주의 시대라 돈이 최고의 가치라 칭송 받는 시대이기도 하고, 또 사람들은, 다수가 돈을 쫓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각자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서 뛰고 노력하고 있다. 주저리 주저리 말했지만, 결국 “가치관이 어떻느냐?” 하는 이야기 이다.

도덕 교과서에서 본 내용인지 어디서 본 바에 의하면 사람의 가치관은 성인이 되기 전에 형성되어서 그 이후로는 큰 변화가 없이 평생을 지속된다고 한다. 따라서 청소년기에 보고 듣고 느낀 바가 매우 중요하고 이를 올바르게 형성하기 위한 환경을 부모가 만들어 주는 것도 부모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것이다. 뭐 어쨋든 지금까지는 일반적인 이야기 였고,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의 경우는 최고의 가치는 “정직”이었다.

당장 놀 수 있는 것이 가장 즐거운 시절이고,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왜 나쁜지도 잘 몰랐던 시절부터 항상 “정직해라”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어느 정도 영향 받아서 나는 남에 비해서 꽤나 정직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부모님께 감사를 느낀다. 차라리 거짓된 것보다는 아무것도 안하는게 나은 것이다. 사실 정직이 왜 소중한 보물이 될 수 있는지는 대학교 입학해서도 한동안 잘 몰랐었는데, 그나마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하고 이루고 하는 과정에서 어렴풋이나마 나름대로 조그만 생각이라도 품을 수 있어서 적어본다.

그 비중을 놓고 보면 남을 속이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에 비해서 아주 조그만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직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정직하지 않다는 것은 옳음과 그름의 가운데를 나누고 있는 줄자를 자기 임의로 왼쪽으로 옮겼다, 오른쪽으로 옮겼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당연히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다르게 판단하며 적당히 잘못된 자신의 행동은 적당히 옳은 것으로 위장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위치한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첫번째로는 어느 방향으로 자신을 밀고 나갈지를 결정할 수도 없고, 두번째로 더 심각한 문제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데 있다. 항상 옳고 그름을 적용하는 잣대가 다르기 때문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사방 팔방으로 왔다갔다 하는데 낭비할 뿐이고, 이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다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단지 옹졸한 생각 하나만으로 무시하면서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다. 식물인간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단어다.

태어난 순간부터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그냥 그 자리에서 평생을 살면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태어남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라면 이 거대한 우주속의 물질계에서 그 축복을 선택되어 누리게 되었음으로 운명적으로 책임 지워지는 의무들이 몇 가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 의무는 인류 공동체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까지 가서 무엇인가를 얻어 오는데 있고, 정직하지 못함은 그 곳까지 가는 자신의 두 발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정직하지 못함의 해악 중 가장 큰 범위의 사고다. 전에도 말했듯이 소규모의 사회와 가족의 범위로 차츰 범위를 줄어 나가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으며 자신이 발전하지 못한 것처럼, 가족, 사회, 나라도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족쇄로 작용할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정직”이란 자연이 그런 것처럼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근본의 덕목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