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인상

 신기한 현상. 자기 전에는 주로 집에 있는 Synthesizer를 가지고 놀기를 즐기는데, 이 녀석의 커버를 벗기고 한번 소리를 들어보는 것 만으로 오늘의 이 유희가 즐거울지, 아니면 지겨운 연습에 지나지 않을지 판단할 수 있다. 굳이 손가락을 움직여서 리듬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Grand Piano 1 의 음색으로 C음을 한번 꾹 눌러서 들려오는 헤드폰의 소리가 귀에 거북하게 들리는 날과, 또 천상의 음색처럼 아름다운 음으로 들리는 날이 분명하게 이분 된다는 것이다. 딱히 어중간한 날도 없고 너무나도 명확히 구분되는 이 음의 편차에 따라서, 악보를 펼쳐놓고 신나게 다른 음들을 쏟아내던지, 아니면 다시 커버를 씌우고 그냥 잠자리에 들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귀가 아주 민감한 인지기관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기억을 거슬러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시절 이어폰을 보청기처럼 끼고 다녔던 시절에도 같은 노래를 들어도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흥이나는 음악의 향연일지, 단순히 귀에서 이어폰의 아픔만을 느끼게 될지 분명하게 알아차렸던 것이다. 별다른 사고의 과정이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닌데도, 이러한 판단을 하고 또 다음에 이어폰을 신경질적으로 빼버릴지, 혹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장단을 맞출지 어느 쪽이든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엄밀히 첫 인상이라고 하기 보다는 같은 대상에 대한 무엇인가가 내 속에서 시시각각 알수없게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을 듯 하다.

 그리고 최근의 비슷한 경험이 하나 더 있는데, 늘 스포츠 센터에서 사이클을 살짝 밟아준 후 런닝머신으로 본격적인 땀흘리기에 돌입하는데, 처음 사이클을 돌릴때의 미묘한 느낌에 따라서 오늘 열심히 달릴 수 있을지, 혹은 “오늘은 날이 아니네, 적당히 하자.” 라고 결심한다. 그리고 또 실제로 달려보면 그 말이 맞다. 정말 다리 한 걸음 떨어뜨리기 힘든 날이 있고, 또 다른날은 내 몸의 지방이 날라가는 것이 몸으로 느껴질 만큼 달리는 날이 있고 말이다. 도저히 이 정도 페달을 밟아서는 알 수 없을 것 같은 몸의 상태를, 무엇 인가에 의해서 느끼는 것이다. 매일매일 똑같이 해오는 운동인데도.

 그래서 과연 그게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이것이 바로 바이오리듬인가? 그 옛날 윈도우 3.0 영문판을 쓰던 시절. 게임도 없고, 다른 것은 더 없던 시절에 유일하게 있던 소중한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바로 바이오리듬을 체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자신의 생일을 입력하면, 그 때부터 다른 주기의 sin 그래프가 3가지 색깔로 그려지고, 감성, 지성, 육체로 구분되는 컨디션이 나타나는 것이다. 고작해야 3개의 sin 그래프로 사람의 능력치를 평생 알 수 있다는 것이 사실 믿기 어려웠지만, 놀랍게도 정확하게 반복되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그 주기성 때문에, (마치 생리주기나), 그렇다고 또 완전히 무시하고 살자니 꺼림찍 한 것이다. 그래서 일단 “바이오 리듬일수도 있겠다.” 아주 조금 납득하고.

 이러한 느낌이 주기적인지, 혹은 아닌지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수많은 외부 환경에 의한 결과론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리로가 아닌 몸의 모든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여진 정보를 분석해서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머리 속으로 생각나는 “아 오늘은 어때”라는 느낌은 머리 속의 사고의 과정이 아닌 이미 몸이 모든 감각기관에서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내린 결과라는 생각은 어떨까? 정말 그렇다면 스스로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고, 또 얼마나 복잡한 프로세스로 몸이 느끼고 반응하는지 아직도 무궁무진한 연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아니면 거꾸로 실제로는 아주 조그만 육체적인 느낌을 받았을 뿐인데, 이미 머리속에 들어있던 “오늘은 운동을 열심히 해야해”“어제 열심히 했으니까 오늘은 좀 살살해도 되겠지” 혹은 “오늘은 일찍 자야해서 피아노를 오래 칠 수 없어” “간만에 손좀 풀어야 하지 않겠어” 라는 생각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이 느낌을 확대 해석하고 그래서 나온 결론이 몸 전체를 지배해버리게 된다는 그런 프로세스 일 수도 있겠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게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그 미묘한 과정이 마술사의 검은색 가리개 뒷편처럼 볼 수 없으니, 속 시원히 이거다 라고 납득하기도 힘들다.

 결론적으로는 이렇다. 대상에 대한 최초의 아주 조그만 느낌과 그리고 그 후에 우리가 가지게 되는 어떤 대상에 대한 완전한 관념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완전히 자신에게만 의존적인 어떤 속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가지는 조그만 느낌이 사실 거대한 인지이고 그에 따라 관념이 형성되는 것인지. 혹은 대상에 대해 미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혹은 무엇인가가 인지를 왜곡시켜서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 가는 것인지. 무엇을 더 알아야 풀릴 수 있는 의문일까?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주 간단한 포스트 하나.

 아침에 스포츠센터에 가면 열심히 운동을 하는 여학우 분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땀 흘리면서 자신을 가꾸어 간다는 것이 보기 좋은데, 몇 달동안 보아오면서 하나 생기는 의문점이 있었다. “왜 운동은 아담 사이즈의 키가 작으신 분들이 더 열심히 할까?” 하는 것인데, 대부분 스포츠센터에서 보이는 여성 분들은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런 의문이 되겠다.

 그래서 몇 달동안 “왜 키가 작은 분이 더 운동을 열심히 하는 현상이 나타날까?” 를 런닝머신 위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키의 분들이 자기 신체에 대한 계발 욕구를 더 심하게 느끼기 때문에?” 아니면 “운동을 꾸준히 하면 키가 크지 않는 어떤 요인이 있는 것일까?” 마치 사회 현상에 대한 인과관계를 추론하는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들 처럼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러한 의문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광경을 목격했으니, 어떤 평균보다 좀 작은 키를 가지고 계신 여성 분이 운동을 하고 계셔서, 그런가보다 하고 옆의 런닝머신에서 오늘의 달리기를 시작하는데, 잠시 후에 창 밖으로 아까 달리시던 그 분이, 다리가 한층 늘씬!해져서 스포츠센터 앞을 걸어가는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정답은 힐.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