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으세요? 그러면 말러를 들으세요

울고 싶을때는 20세기 후반들어 새롭게 재발견된 작곡자 말러의 곡을 들어보세요.

하얀 눈처럼 빛나는 서정성으로 감동과 눈물을 주는 슈만 같은 작곡자도 있는 반면에
절망과도 같은, 저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는, 끝없이 침전되는 슬픔의 눈물도 있습니다.

바로 말러가 대표적인, 그런 느낌을 주는 작곡자 중의 한명이지요.
그의 교향곡으로 대표되는 음악 레퍼토리 중 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나 , 9번의 4악장
아다지오를 들어보면 고개는 절로 숙여지고 웃음을 잃게 됩니다. 딱히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되지도 않고, 아니 할수도 없게 되지요. 단지 무거운 슬픔이 마음을 억눌러 답답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단념과 숙연함만 있는 거지요.

이 느낌은 바로 죽음의 공포에 억눌리는 바로 그 것 입니다.

음악은 생명체로 가질 수 밖에 없는 아주 본능적인 공포를 건드리기 때문에 매우 호소력
있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을 겪고 난 후의 느낌은 카타르시스라고 하나요.
바로 정화된 영혼. 죽음의 반대편에 항상 붙어있는 삶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느끼면서
한결 성숙되고 상쾌한 기분을 불러오게 됩니다.

과장되어 말하면 20세기 후반을 양분했다고 할 수 있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위에서 언급
한 두 악장에 대해서 각각 높게 평가되는 공연을 했고 이 실황을 레코딩으로 남기고 있는데요.
20세기 후반의 화두라고 할 수 있는 작곡자에 대해서 두 거장의 한치의 양보도 없이 명연을
펼쳤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카라얀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9번(1982)
번스타인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5번(1987)

절제의 미학

 인간의 감정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이 감정이라는 녀석이 한계가 있어서 아무리 기쁜일, 슬픈일이라도 일정 수준 이상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과 또 하나는 적응력이 뛰어난 나머지 두번째로 받은 인상은 첫번째로 받은 인상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러한 기쁨은 기본적으로는 어떤 의욕에 불타오를 수 있는 강력한 추진동기가 되기도 하고 또한 그 존재 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위대한 가르침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대상물이 나의 이해 범위를 너무나도 뛰어 넘는 것일때 또 그러한 나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때 ‘아 이러한 경험은 조금 더 내가 성숙한 후에 했으면 훨씬 더 커다란 가르침을 받았을 것을.’ 이라는 아쉬움이 한겨울의 추위 처럼 꼼짝할 수 없이 나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조금 더 현명한 사람이라면 대상을 조금씩 음미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 그리고 소화해 조금 더 커다란 감동과 배움을 얻을 것이지만, 나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아직 부족한 탓인지.. 단지 압도되고 모처럼의 기회는 커다란 파울볼이 되어 튕겨 나갈 뿐.

또한 이러한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자극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면 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의지라던가 호기심과 탐구심에서 비롯되는 지식의 욕구라던가. 그런 것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나약한 자신의 모습이 올라와 현실과 타협해 버리는 것이다! 나 자신이 현실속으로 녹아들어버린다면 옳은 표현일까. 감정의 본질이 이러한 특징이라면 역시 이러한 대상에 맞서는 횟수를 스스로 조절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결국, 기쁨에도 절제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모든 감정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 이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은 더욱 간편해지고 즉각적이 되었지만, 편지에서 얻을 수 있는 한단어 한단어 신중히 선택하여 오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모두들 MP3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즐거운’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일까. 습관적으로 ‘즐거운’ 노래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닐까. 마약처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오랜만에 만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기쁨을 스스로 배가시켜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