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미학

 인간의 감정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이 감정이라는 녀석이 한계가 있어서 아무리 기쁜일, 슬픈일이라도 일정 수준 이상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과 또 하나는 적응력이 뛰어난 나머지 두번째로 받은 인상은 첫번째로 받은 인상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러한 기쁨은 기본적으로는 어떤 의욕에 불타오를 수 있는 강력한 추진동기가 되기도 하고 또한 그 존재 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위대한 가르침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대상물이 나의 이해 범위를 너무나도 뛰어 넘는 것일때 또 그러한 나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때 ‘아 이러한 경험은 조금 더 내가 성숙한 후에 했으면 훨씬 더 커다란 가르침을 받았을 것을.’ 이라는 아쉬움이 한겨울의 추위 처럼 꼼짝할 수 없이 나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조금 더 현명한 사람이라면 대상을 조금씩 음미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 그리고 소화해 조금 더 커다란 감동과 배움을 얻을 것이지만, 나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아직 부족한 탓인지.. 단지 압도되고 모처럼의 기회는 커다란 파울볼이 되어 튕겨 나갈 뿐.

또한 이러한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자극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면 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의지라던가 호기심과 탐구심에서 비롯되는 지식의 욕구라던가. 그런 것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나약한 자신의 모습이 올라와 현실과 타협해 버리는 것이다! 나 자신이 현실속으로 녹아들어버린다면 옳은 표현일까. 감정의 본질이 이러한 특징이라면 역시 이러한 대상에 맞서는 횟수를 스스로 조절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결국, 기쁨에도 절제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모든 감정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 이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은 더욱 간편해지고 즉각적이 되었지만, 편지에서 얻을 수 있는 한단어 한단어 신중히 선택하여 오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모두들 MP3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즐거운’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일까. 습관적으로 ‘즐거운’ 노래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닐까. 마약처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오랜만에 만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기쁨을 스스로 배가시켜보면 어떨까.